시집속의 詩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靑巖 2019. 8. 15. 14:13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김기택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서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어둠’이 지속되는 시간을 배경)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어둠’은 그동안 방 안에 들어오지 못했던 작은 풀벌레 소리들을 방 안에 들어오게 하는 모습에서 포용력을 확인)/텔레비전을 끈 후 방 안으로 들어온 풀벌레 소리 - ‘텔레비전’을 끈 후 평소 관심을 두지 못했던 ‘풀벌레 소리’를 지각

 

어둠(‘어둠’은 ‘풀벌레 소리’를 도드라지게 하고 있다. ‘어둠’의 포용력을 앞세워 ‘어둠’이 밝음에 순응하는 모습을 부각하고 있다.) 속에서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어둠 때문에 화자가 풀벌레 소리를 더욱 선명하게 듣게 되었음)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 화자는 ‘큰 울음’뿐만 아니라 ‘들리지 않는 소리’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화자의 인식 범위가 확장(방 안이 조용해지고 어둠이 찾아오자 ‘큰 울음’만 있는 게 아니라 들리지 않아 인식하지 못했던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음을 알게 되어 작은 풀벌레 소리에까지 인식이 확장)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 화자는 ‘들리지 않는 소리’의 주체들이 화자 자신 때문에 서로 소통할 수 없게된 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고 있음.

 

화자가 자신 때문에 ‘들리지 않는 소리’의 주체인 작은 풀벌레들의 소통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다만 텔레비전 때문에 풀벌레들의 작은 소리들이 벽에 부딪쳐 돌아가서 자신과 소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작은 것들에 무심했던 자신에 대해 반성하고 아쉬워하고 있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 화자는 자신이 의식하지 못했던 ‘그 울음소리들’을 떠올리며, 그 소리를 간과했던 삶을 성찰(그동안 텔레비전의 빛이 화자의 귀를 두껍게 채운 벽 때문에 듣지 못했던 작은 풀벌레 소리를 인식하고 있으며 그동안 작은 소리를 간과했음을 깨닫고 반성)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화자의 귀에 듣지 못했던 풀벌레들의 소리를 생각하여 자신을 성찰함

 

크게 밤공기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풀벌레 소리를 내면 깊숙이 받아들임 - ‘그 소리들’을 귀로만 듣지 않고 내면 깊숙이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허파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 소리들’을 내면 깊숙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의미)

 

{해제} 이 시는 늘 시끄럽고 요란한 소리를 뿜어내는 텔레비전 앞에서 저녁 시간을 보내던 화자가 텔레비전을 끄고 풀벌레 소리를 듣게 된 경험을 통해, 잊고 사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브라운관이 뿜어낸 현란한 빛’에서 벗어나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를 접하게 된 화자는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라 추측하며 자신이 잊고 살았던 자연의 평온함을 비로소 인식하게 된다. 텔레비전의 빛과 소리로 대표되는 인공적인 삶의 환경들과 어둠, 별빛, 풀벌레 소리로 대표되는 자연의 삶을 대조함으로써 화자는 차분히 자신의 내면을 돌아볼 시간도 없이 그저 인공적인 삶 속에서 원초적인 쾌락에 몸을 내맡겨 버린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의 자세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가까이 왔다가 되돌아가는 풀벌레들의 존재를 알리며 현대인들에게도 내면을 채울 수 있는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고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주제} 풀벌레 소리로 인한 삶에 대한 성찰

 

 

 

출처: 한백형의 국어 국문학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