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巖 2019. 8. 29. 21:53

* 국수


                 -백석-

 

 

눈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은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얀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옛적 큰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 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굴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 주막


             -백석-

 

 

호박잎에 싸 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다

 

부엌에는 빨갛게 질들은 팔모알상이 그 상 위엔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만한 잔(盞)이 뵈였다

 

아들 아이는 범이라고 장고기를 잘 잡는 앞니가 뻐드러진 나와 동갑이었다

 

울파주 밖에는 장꾼들을 따라와서 엄지의 젖을 빠는 망아지도 있었다

 

 

* 붕어곰 : 붕어를 알맞게 지지거나 구운 것

 

* 질들은 : 오래 사용하여 반들반들한

 

* 팔모알상 : 테두리가 팔각으로 만들어진 개다리소반

 

* 장고기 : 잔고기. 농다리와 비슷하다

 

* 울파주 : 대. 수수깡. 싸리. 갈대 등을 엮어 놓은 울타리

 

* 엄지 : 짐승의 어미

 

 

 

* 감자 먹는 사람들-삽질 소리 -정진규-

 

 

우리들도 그렇게 둘러앉아

 

삶은 감자를 먹던 때가 있었다

 

불빛 흐린

 

언제나 불빛 흐린

 

저녁 식탁이

 

누구의 손 하나가 잘못 놓여도

 

삐걱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셋째 형만이

 

언제고 떠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잘 삶아진 굵은 감자알들처럼

 

마디 굵은 우리 식구들의 손처럼

 

서걱서걱 흙을 파고 나가는

 

삽질 소리들을 꿈속에서도 들었다

 

누구나 삽질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타고난 사람들이었다

 

새벽에는

 

빗줄기가 조금 창문을 두드렸다

 

제일 부드러웠다

 

새싹들이 돋고 있으리라 믿었다

 

오늘은 하루쯤 쉬어도 되리라

 

식구들은

 

목욕탕엘 가고 싶었다

 

 

 

* 감자 먹는 사람들



               -김선우-

 

 

어느 집 담장을 넘어 달겨드는

 

이것은,

 

치명적인 냄새

 

 

식은 감자알 갉작거리며 평상에 엎드려 산수숙제를 하던, 엄마 내 친구들은 내가 감자가 좋아서 감자밥 도시락만 먹는 줄 알아. 열한 식구 대꺼리를 감자 없이 무슨 수로 밥을 해대냐고, 귀밝은 할아버지는 땅밑에서 감자알 크는 소리 들린다고 흐뭇해 하셨지만 엄마 난 땅속에서 자라는 것들이 무서운데, 뿌리 끝에 댕글댕글한 어지럼증을 매달고 식구들이 밥상머리를 지킨다 하나둘 숟가락 내려놓을 때까지 엄마 밥주발엔 숟가락 꽂히지 않는다

 

 

어릴 적 질리도록 먹은 건 싫어하게 된다더니, 감자 삶는 냄새

 

이것은,

 

치명적인 그리움

 

 

꽃은 꽃대로 놓아두고 저는 땅밑으로만 궁그는,

 

꽃 진 자리엔 얼씬도 하지 않는,

 

열한 개의 구덩이를 가진 늙은 애기집

 

 

 

 

 

* 상치쌈


                 -조운-

 

 

 

쥘상치 두 손 받쳐

 

한입에 우겨넣다

 

 

 

희뜩

 

눈이 팔려 우긴 채 내다보니

 

 

 

흩는 꽃 쫓이던 나비

 

울 너머로 가더라.

 

 

 

 

 

* 찬밥


                 -문정희-

 

 

 

아픈 몸 일으켜 혼자 찬밥을 먹는다.

 

찬밥 속에 서릿발이 목을 쑤신다

 

부엌에는 각종 전기 제품이 있어

 

일 분만 단추를 눌러도 따끈한 밥이 되는 세상

 

찬밥을 먹기도 쉽지 않지만

 

오는 혼자 찬밥을 먹는다.

 

가족에겐 따스한 밥 지어 먹이고

 

찬밥을 먹던 사람

 

이 빠진 그릇에 찬밥 훑어

 

누가 남긴 무 조각에 생선 가시를 핥고

 

몸에서는 제일 따스한 사랑을 뿜던 그녀

 

깊은 밤에도

 

혼자 달그락거리던 그 손이 그리워

 

나 오늘 아픈 몸 일으켜 찬밥을 먹는다.

 

집집마다 신을 보낼 수 없어

 

신 대신 보냈다는 설도 있지만

 

홀로 먹는 찬밥 속에서 그녀를 만난다

 

나 오늘

 

세상의 찬밥이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