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

이어령

靑巖 2019. 8. 30. 21:27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세상


한국 최고의 지성이자 석학. 이어령 이화여자대학교 명예석좌교수는 요즘 인생에서 가장 농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암에 걸렸는데, 치료 대신 글쓰기를 선택했다. 그 농밀한 시간의 한 조각을 공유했다. 그가 살아온 시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삶과 죽음을 대하는 방식에는 인생의 여러 가지 답이 담겨 있었다. 과 내가 움직인다



서재는 재미있는 공간이다. 생명이 있는 것처럼 숨을 쉬고, 때로는 말도 한다. 모든 서재가 그런 건 아니다. 주인장의 손길과 애정의 마음이 닿아 있어야만 가능하다. 사람의 온기가 닿지 않은 서재는 숨을 쉬지 않는, 죽은 목숨과 같다.

종로구 평창동 이어령 교수의 서재를 찾았다. 겨울 햇살이 환하게 비치는 서재에는 벽면을 빼곡하게 채운 책들과 곧 세상에 나올 책이 되기 위해 쌓여 있는 수많은 노트와 자료들이 팔딱팔딱 생명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청년’의 생명력이 느껴지는 서재다.

한국 최고의 지성이자 석학인 이어령 교수는 올해 한국 나이로 여든 일곱이다. 새해를 맞아 나이의 숫자가 달라지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일이지만, 처음 받아들인 숫자는 새삼스럽고 각별하다.

암 투병 중인 그는 생의 그 어떤 순간보다 농밀하고 치열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항암치료 대신 받아들임을 선택했고, 평생 해오던 글쓰기에 더욱 몰입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컨디션이 허락하는 한 강연도 다닌다. 인터뷰 하루 전에도 강연이 있었다. 규모가 큰 강연이라 조금 피곤하다며 자리에 앉았지만,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니 금세 두 눈이 반짝거리고 목소리가 올라갔다. 팔딱팔딱 생명력을 뿜어내는 서재와 꼭 닮은 주인장이다.

투병 소식이 공개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 눈물을 훔쳤다는 분들도 많다. 내가 안 우는데 왜 남이 울어.(웃음) 재미있다고 말하면 어폐가 있지만, ‘나 캔서(cancer·암)야’라고 말하면 우는 사람이 있고 태연하게 대하는 사람이 있다. 우는 사람이 나를 더 애정하고 같이 아파하는 사람이라고 획일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전혀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또 거꾸로 나를 생각해서 일부러 밝게 대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순간순간을 마주하면 내 자신도 어떤 감정에 말려든다. 평소엔 초연하다가도 고통스럽기도 하다.



오랫동안 투병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었는데. 되도록 이야기 안 하고 사람을 안 만나고 지내려고 했다. 그런데 어차피 내가 말하지 않아도 병원에 다니고 하다 보면 소문이 퍼진다. 가까운 사람에게는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가까운 사이인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소식을 들으면 상처를 입지 않겠나. 이런 과정들을 지나며 인간관계의 모든 것을 마주한다. ‘아, 이것이 삶이구나. 인간관계구나. 이런 체험을 하면서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 끝없이 변하고 생각이 달라지는구나’ 생각한다. 이런 것들이 나에게는 암에 안 걸렸으면 절대로 모를, 모르고 죽었을 일들이다. 또 몰랐던 생이 온 거다.

덕분에 우리 사회에 ‘죽음’이라는 화두가 던져졌다. 인간의 삶의 과정을 보면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 전쟁 때는 모든 사람이, 지금의 나처럼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산다. 전쟁의 일상은 사람이 죽는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와 중학교 때 전쟁을 두 번 경험했다. 사실 우리 세대는 죽음과 관념적으로 익숙하다. 젊은이들이 봤을 때는 가난한 시절에 살아서 먹고사는 것만 걱정한 세대로 보이겠지만, 정반대다. 그렇게 가난했음에도 죽음과 맞닿은 삶을 살아 형이상학적인 사고를 했다. 죽음이란 뭐냐, 삶이란 무엇이냐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했단 말이다.

지금은 죽음이 죽어버린 시대인가? 예전에는 길을 지나가면 시체가 보였다. 요즘은 죽음의 처참함을 볼 기회가 없다. 죽은 사람도 깨끗하게 화장한다. 어린 세대는 노인이랑 안 산다. 자기가 늙는 걸 실감 못 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이빨 빠지고 머리 빠진 노인이 많았다. ‘늙으면 저렇게 되는구나’ ‘저게 죽음이구나’ 알았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았던 아이들이 인생을 보는 눈과 혼자 형제 없이 아버지 어머니 밑에서 자란 사람은 인생의 부피가 상대가 안 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을 하셨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이다. 먹고사는 문제, 정치 경제 문제가 본질적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영원히 살 사람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 뭔지 아는 사람은 절대로 독재를 못 한다. 어떤 권력자도 하늘이 두려운 걸 알면 못된 짓을 못 한다. 하늘이 곧 죽음이다. 요즘 무한 악을 저지르는 시대다.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는다.

# 글쓰기는 나의 목숨이자 생명
쓰지 않으면 육신의 삶이 멈춘 것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는 것을 빼면, 암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과 후의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대부터 평생 글쓰기에 매달렸던 그는 지금도 똑같이 글을 쓴다. 암 판정을 받자마자 든 생각은 더 치열하게 글을 쓰겠다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시간을 보내느니 못 쓴 글을 쓰겠노라 마음먹었다. 죽음을 조금 더 가깝게 인지하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작업에 밀도와 속도가 붙었다.

글쓰기는 굉장한 체력이 소모되는 일이다. 괜찮나. 사람들이 나에게 해주는 말 중 가장 허망하다고 느끼는 말이 “이제 좀 쉬세요. 그만큼 쓰셨으면 됐어요. 몸도 편찮으신데 무리하지 마세요”다. 나는 쓰는 게 쉬는 거다. 이게 사는 거다. 남이 볼 때는 글 쓰는 행위가 싫은 걸 억지로 하는 일종의 노동으로 보이나 본데, 나에게 글쓰기는 삶 자체다. 목숨을 건 행위다. 글쓰기를 멈춘다는 것은 내가 죽는다는 말이다.

지금은 어떤 글을 쓰고 있나. 살았다는 증거로 아무 글이나 쓸 수 없다. 내가 캔서를 받아들였다고 죽음과 관련된 글이나 병상일기를 쓴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글도 아니다. 병원에 가는 시간보다 글 쓰는 시간에 집중해야겠다고 조바심을 내는 것은, 그만큼 절박함이 있는 글을 쓰기 위해서다. 나는 평생 글을 써온 사람이다. 지금까지 써온 것과 전혀 다른 것을 남기고 있다. 70대에 한 일간지에 ‘한국인 이야기 시즌1’을 연재했다. 생명자본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걸 완성하려고 한다. 탄생에 관한 주제다.

내용을 조금만 공개한다면. 내 기억의 극한까지 가보고 있다. 스톱된 장소 너머에 가서 쓰는 게 지금 내가 쓰는 이야기다. 가령 태내에 있었을 때다. 나는 모르지만 자료를 통해서 태생기, 태동기를 만난다. 어떻게 10개월이 되면 발을 차고 나갈 생각을 할까, 어떤 힘이 있을까 생각한다. 책에도 썼지만, 인생은 이별이 먼저다. 10개월 동안 따뜻한 공간에 살고 있다가 세상으로 나온다. 남들은 태어난다고 하지만, 탯줄을 끊고 헤어지는 거다. 그러니 우리 인생은 본디 헤어짐이 먼저였다. 어머니를 떠나야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 어머니와 한몸에서 타자가 되었고, 분열이 되었다. 우리 인생은 만남이 먼저가 아니고 헤어짐이 먼저다.

20대부터 지금까지 치열하게 글쓰기에 매진한 삶이었다. 이어령에게 글쓰기는 어떤 의미인가. 흰 종이가 있어서 그림을 그렸다. 흰색이 있어서 색깔 있는 삶을 살았다. 글을 쓰기 전의 원고지는 하얀 원형이다. 그 원형에 무언가가 있었더라면 나는 아무것도 쓸 수 없었겠지. 그게 텅 비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쓸 수 있었다. 돌아보면 젊은이의 행복한 허무주의였다고 본다. 그 덕에 나는 나만의 글을,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죽음이라는 바탕 위에 내 생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이 나이에 내가 캔서와 관계없이 글을 쓰는 것이다.

운명이라는 말로 들린다. 글 쓰는 사람들은 ‘전생에 죄 지은 사람이나 하는 일’이라는 말을 한다. 힘든 일이다. 일이란 게 뭐든 시작과 끝이 있는데, 생각하는 건 24시간 아닌가. 나는 꿈에서마저도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다. 꿈속에서도 글을 쓴다. 쓰다 만 글을 머릿속에서 이렇게 쓰고, 저렇게 쓴다. 글쓰기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노력한 것도 아니다. 운명처럼 글을 쓴다. 그러니 내게 “그만하면 됐다. 편안하게 여행이나 다니시라”는 말은 정말 모르는 소리다. 그게 있기 때문에 사는 건데? 그게 없으면 육신이 있어도 죽음이다. 나에겐 하루를 더 사는 게 의미가 없는 일이다.

일과가 어떻게 되나. 요즘도 새벽까지 글을 쓰나? 노인의 특징이란 게, 잠을 못 잔다. 새벽 3시에 꼭 깬다. 서재로 올라와서 책을 꺼내 읽는다. 눈에 띄는 책을 쓱 꺼내서 펼쳐보면, 눈에 딱 띄는 구절이 있다. 그럴 때는 입에서 ‘악’ 소리가 난다. 내가 그 늦은 시간에 일어나서 그 책을 꺼내지 않았더라면, 죽을 때까지 이 사실을 모를 뻔한 것 아닌가. 잠을 잤더라면 영원히 몰랐을 어떤 지식이 내 생각의 큰 변화를 준다. 내가 살아서 책을 읽어, 그 페이지를 읽었기 때문에 과거·현재·미래의 무수한 생각의 한 길이 열린다. 쿨쿨 잤더라면 적어도 이 책과 만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설인가. 우리는 끝없이 혼자 사는 것 같지만, 그 시간을 공유한다. 시간을 공유하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은 여기 있지 않을 것이고, 상대 스토리가 달라졌을 것이다. 같은 장소,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면 참 소중한 것이다. 누구와의 만남이라는 것이 단순히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아니라, 수천 수만 명의 스토리를 바꿔주는 일이다. 그 속에 내가 있다.
 

# 인생은 물음표와 느낌표를 오가는 여정
‘삶은 무엇이냐’는 질문, ‘사는 게 무엇이냐’가 맞다

그는 인생은 물음표와 느낌표를 오가는 여정이라는 말을 자주 해왔다. 물음표는 이성적인 것을, 느낌표는 감성적인 것을 말한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추와 같이,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대화와 같이 이쪽과 저쪽을 오가며 균형을 찾아가는 것은 그가 생각하는 방식이기도, 글을 쓰는 방식이기도 하다.

요즘 주로 하는 생각들이 궁금하다. 습관적으로 하는 일이 있다. 책을 읽거나 사람을 만나면, 언제 태어났나부터 본다. 확인해보면 재미있다. 30년 전후를 산 예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제일 나이가 많은 괴테도 여든 셋이더라. 옛날 사람이라 나이가 많은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모두 나보다 어리다. 내가 한국 나이로 여든 일곱인데, 살아 있기 때문에 이 나이에 글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 소중하다. 인류 역사적으로도 소중한 것 아니겠나.(웃음)

과거를 떠올리기도 하나? 특별히 생각하려고 해서 생각하는 건 아니고, 옛날에 쓴 글이나 사진을 보면 생각난다. 지금은 앞을 내다보는 시간보다 뒤를 돌이키는 시간이 더 길다.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 애쓴다. 망각은 진리의 반대말이다. 망각하지 않기 위해 내 마음을 일깨우는 것은 진리를 찾는 행위다. 프루스트가 여름방학에 몇 천 페이지 글을 쓰듯이, 나도 밀도 있는 시간을 가진다. 최근에 떠올린 달래마늘 향기가 그런 것이다. 유년시절, 봄이 막 와서 세상이 녹기 시작할 때 누이를 따라 달래마늘을 캐러 갔었다. 호미로 흙을 슥 캐던 때의 향이 되살아난다. 잊은 건 진실이 아니지만, 기억하면 진리가 된다.

인생을 두고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의 여정이라는 표현을 했다. 재미없는 한자로 표현하면 ‘자문자답(自問自答)’이다. 스스로 물어보고 해답은 자기가 찾는다. 물음은 지적인 것이고 느낌은 감성적인 것이다. 둘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글쓰기다. 물음표와 느낌표는 내가 생각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천재적인 사람도 아니고 머리가 좋은 사람도 아니다. 둔한 사람이다. 다만 궁금한 걸 묻는다. 가령 진화론자들이 네 발로 기던 원숭이가 두 발로 서서, 손이 자유로워 문명 문화를 만들었다고 이야기하면 나는 묻는다. “원숭이들은 수상생활을 해서 손만 있으면 되는데?” 갈릴레오가 혼자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러면 나는 묻는다. “혼자 말했다는데, 누가 들었나?” 질문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가진 수많은 물음표 중 하나를 질문으로 던져보겠다. 삶은 무엇이고 존재는 무엇인가. 그거 알면 글을 써? 산으로 들어가지.(웃음) 수많은 종교에서 하는 말이 물음의 방식을 바꾸라는 것이다. ‘삶이 무엇이냐’고 명사로 묻지 말고, ‘사는 게 뭐냐’고 물으면 쉽다. 산다는 말은 살림살이, 살림을 말한다. 남을 살리는 거다. 불을 살리고, 빛을 살린다. 자기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을 살리는 거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사랑으로 살린 거다. 부모도 나를 살렸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것은 본디 사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만 살아 있나? 이 세상에는 수많은 생명체가 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어느새 내 삶이 풍요롭다. 벌레들, 날아가는 새들, 작은 나뭇잎들에도 생명이 있다. 나는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글을 썼다. ‘삶이 뭐냐’고 말하면 추상적이지만, 나뭇잎 하나 흔들리는 것을 떠올려보라. 살아 있을 때, 움직일 때 세상이 움직이고 내가 움직이고 살아가는 거다.

삶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에 언급된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라는 문구는 그가 젊은 시절 쓴 시 제목이기도 하다. 실존주의 관념에 빠져 살던, 삶과 죽음에 자신을 투신하던 젊은 시절 적어내려간 작품이다. 서재의 바깥 공간인 자택 마당에는 그 시의 한 구절을 조형물로 만들어 설치해뒀다.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가를 들었다 / 대지를 향해서 나뭇잎은 떨어진다 / 어둡고 거친 흙 속으로 향하는 나뭇잎들을 본다 / 거부하지 말라 /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 대지는 더 무거워진다 / 피가 뜨거울 때 잘 있어 잘 가라 / 인사말을 하고 떠나야 한다’

그는 인류 죽음의 대명사인 암을 처음 접했을 때도, 이 작품을 쓰던 20대 청년이던 그때와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했다.

출처; 여성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