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속의 詩
독야청청
靑巖
2019. 9. 1. 19:35
독야청청
안도현
밤 10시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으므로
밤 10시부터 소나무는 가지로 눈을 받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늘이나 구름 혹은 어둠을 받쳐들던 손에
쌀밥 같은 눈송이가 소리 없이 내려앉을 때 처음에는
소나무도 손바닥이 간지러웠을 테고 가끔은
솔잎으로 눈송이를 콕콕 찌르며 장난도 쳤을 것이다
우리가 비닐하우스에 쌓이는 눈을 치우느라고
빗자루 들고 밤새 발 구르며 허둥대던 동안에도
눈 쌓이는 소리 들으려고 귀를 기울였을 것이고
그리하여 소나무의 귓불은 두툼해졌을 것이다
한밤중에 늑대가 와서 밑둥치에 오줌을 찍 휘갈기고 간 시간에도
그 뜨뜻하고 세찬 소리에 젖어 꿈쩍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나무의 일생은 눈의 무게가 아니라
세상의 무게를 걱정하는 데 바쳐야 하는 것,
천지간에 석 자도 더 되는 눈이 쌓이고 쌓여도
소나무는 장엄하게 지휘자처럼 팔을 벌리고
폭설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해야 하는 것,
그러다가 소나무는 저렇게 끝장을 보고 말았을 것이다
눈을 받쳐들었던 팔이 한순간에 부러지며 허공을 때리고
그때 허공은 크게 한번 쩡, 하고 울었을 것이다
저 소나무가 실패한 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눈을 뭉쳐 당신의 뒤통수를 내갈기고 싶을 것이다
저게 실패라면 당신이나 나나 저렇게 한번 실패해 봐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