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
최남선
1
텨……ㄹ썩, 텨……ㄹ썩, 텨ㄱ,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태산(泰山)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텨……ㄹ썩, 텨……ㄹ썩, 텨ㄱ, 튜르릉, 콱.
2
텨……ㄹ썩, 텨……ㄹ썩, 텨ㄱ, 쏴……아.
내게는, 아무것, 두려움 없어,
육상(陸上)에서, 아무런 힘과 권(權)을 부리던 자(者)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텨……ㄹ썩, 텨……ㄹ썩, 텨ㄱ , 튜르릉, 콱.
3
텨……ㄹ썩, 텨……ㄹ썩, 텨ㄱ, 쏴……아.
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者)가,
지금(只今)까지, 없거던, 통지하고 나서 보아라.
진시황(秦始皇), 나팔륜, 너희들이냐,
누구 누구 누구냐, 너의 역시(亦是) 내게는 굽히도다.
나하고 겨룰 이 있건 오너라.
텨……ㄹ썩, 텨……ㄹ썩, 텨ㄱ, 튜르릉, 콱.
4
텨……ㄹ썩, 텨……ㄹ썩, 텨ㄱ, 쏴……아.
조고만 산(山)모를 의지(依支)하거나,
좁쌀같은 작은 섬, 손뼉만한 땅을 가지고,
고 속에 있어서 영악한 데를,
부르면서 나혼자 거룩하다 하는 자(者),
이리 좀, 오나라, 나를 보아라.
텨……ㄹ썩, 텨……ㄹ썩, 텨ㄱ, 튜르릉, 콱.
5
텨……ㄹ썩, 텨……ㄹ썩, 텨ㄱ, 쏴……아.
나의 짝될 이는 하나 있도다,
크고 길고, 너르게 뒤덮은 바 저 푸른 하늘.
적은 시비(是非) 적은 쌈 온갖 모든 더러운 것 없도다.
조 따위 세상(世上)에 조 사람처럼,
텨……ㄹ썩, 텨……ㄹ썩, 텨ㄱ, 튜르릉, 콱.
6
텨……ㄹ썩, 텨……ㄹ썩, 텨ㄱ, 쏴……아.
저 세상(世上) 저 사람 모두 미우나
그 중(中)에서 똑 하나 사랑하는 일이 있으니
담(膽)크고 순정(純情)한 소년배(少年輩)들이,
재롱(才弄)처럼, 귀(貴)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
오나라 소년배(少年輩) 입 맞춰 주마
텨……ㄹ썩, 텨……ㄹ썩, 텨ㄱ, 튜르릉, 콱.
<소년, 1908. 11>
최남선
1890(고종 27)∼1957. 문화운동가·작가·사학자. 본관은 동주(東州 : 지금의 鐵原). 아명은 창흥(昌興). 자는 공륙(公六). 호는 육당(六堂)·한샘·남악주인(南嶽主人)·곡교인(曲橋人)·육당학인(六堂學人)·축한생(逐閑生)·대몽(大夢)·백운향도(白雲香徒). 서울 출신. 아버지는 전형적인 중인계층 출신인 헌규(獻圭)이며, 어머니는 강씨(姜氏)이다.
1895년(고종 32)부터 글방에 다니기 시작하였으며, 1902년 경성학당(京城學堂)에 입학하였고, 1904년 10월 황실 유학생으로 뽑혀 일본에 건너가 동경부립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校)에 입학하였으나 석 달 만에 자퇴하고 귀국하였다.
1906년 3월 사비생(私費生)으로 다시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부 지리역사과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6월 이 학교에서 개최된 모의국회에서 경술국치문제를 의제로 내걸자 격분한 일군의 한국인 유학생들과 함께 이 학교를 자퇴하고 귀국하였다.
1907년 18세의 나이로 출판기관인 신문관(新文館)을 창설하고 민중을 계몽, 교도하는 내용의 책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1908년 근대화의 역군인 소년을 개화, 계몽하여 민족사에 새 국면을 타개하려는 의도로 종합잡지 ≪소년 少年≫을 창간하고, 창간호에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실어 한국 근대시사에서 최초로 신체시를 선보였다.
이후 1919년 3·1만세운동 때는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였다. 문학과 문화·언론 등 다방면에 걸친 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문관의 설립·운영과 ≪소년≫·≪붉은 저고리≫·≪아이들 보기≫·≪청춘 靑春≫ 등의 잡지 발간을 통하여 대중의 계몽·교도를 꾀하는 한편, 창가·신체시 등 새로운 형태의 시가들을 발표하여 한국 근대문학사에 새로운 시가 양식이 발붙일 터전을 닦았다. 당시까지 창가·신체시를 제작, 발표한 사람은 이광수(李光洙)가 있었는데 양과 질에서 그를 앞질렀던 것이다.
둘째, 그때까지 쓰여온 문장들이 대개 문주언종(文主言從)의 한문투가 중심이었는데 이것을 새 시대에 맞도록 구어체로 고치고 그와 동시에 우리말 위주가 되게 하여 여러 간행물과 잡지 매체를 통해서 그것을 선전, 보급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 이전까지 우리 주변의 지배적 경향인 문어체 문장이 지양, 극복되고, 아울러 낡고 고루한 말투가 없어지는 등 문장개혁이 이루어졌다.
셋째, 민족문화가 형성, 전개된 모습을 한국사·민속·지리연구와 문헌의 수집·정리·발간을 통해 밝히기도 하였다. 이것은 민족사의 테두리를 파악하려는 의도와 함께 그 바닥에는 한국민족의 정신적 지주를 탐구하고 현양하려는 속셈이 깔려 있었다. 나아가 민족주의 사상을 집약시킨 ‘조선정신(朝鮮精神)’을 제창하기까지 하였다.
한편, 여러 분야에서 방대한 양의 업적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다섯 분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한국사에 대한 연구로, 이는 ≪청춘≫ 1918년 6월호에 발표한 〈계고차존 稽古箚存〉에서 비롯된다. 이 글은 당시로 보아서는 상당 수준의 논문으로 그 내용이 단군시대에서부터 부여·옥저·예맥 등에 걸치는 것이었다.
1920년대에는 〈조선역사통속강화 朝鮮歷史通俗講話〉·〈삼국유사해제 三國遺事解題〉·〈불함문화론 不咸文化論〉·〈단군신전(檀君神典)의 고의(古義)〉등을 발표하였고, 1930년대 이후에 ≪역사일감 歷史日鑑≫·≪고사통 故事通≫ 등 방대한 규모의 작업을 이룩하였다.
② 문화유산의 발굴·정리 및 그 평가 시도로 이는 다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동명사(東明社)·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 등의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조선광문회 단계에서는 우리 고전소설인 〈춘향전〉·〈옥루몽〉·〈사씨남정기〉·〈흥부놀부전〉·〈심청전〉·〈장화홍련전〉·〈조웅전〉 등을 정리, 발간하였고, 동시에 ≪동국통감 東國通鑑≫·≪열하일기 熱河日記≫ 등 한문 고전들도 복각, 보급하였다.
동명사 때에는 ≪조선어사전≫ 편찬을 기도하였으며, 이는 계명구락부 때로 이어졌다. 이때 한글 연구가의 한 사람인 박승빈(朴勝彬)과 제휴하여 사전편찬사업을 구체화시켜나갔다. 또한, ≪삼국유사≫의 주석정리 해제를 하고 ≪금오신화≫의 보급판도 간행하였다.
③ 국토 산하 순례예찬과 그 현양 노력은 ≪심춘순례 尋春巡禮≫·≪백두산근참기 白頭山勤參記≫·≪송막연운록 松漠燕雲錄≫ 등으로 대표된다. 이 글들을 통하여 한반도 전역뿐만 아니라 만주와 몽고에 이르기까지 여러 명소·고적들을 더듬고 거기서 우리 민족의 옛날을 되새겼다.
④ 시조부흥운동을 중심으로 한 민족문학운동은 시조의 창작 활동과 그 이론을 다진 일들로 대표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민족적 시가 양식으로서 시조가 재정리, 창작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카프의 계급지상주의에 맞서 다수의 작품을 제작, 발표하였다.
이것의 집대성이 창작시조집 ≪백팔번뇌 百八煩惱≫이다. 또한,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시조 태반으로서의 조선민성(朝鮮民性)과 민속〉등을 발표하여 시조부흥운동의 논리적 근거를 세웠다.
⑤ 민속학에 대한 연구는 ≪동국세시기≫ 등 당시까지 사본으로 전해오던 것을 수집, 간행한 것을 비롯하여, 〈단군론 檀君論〉·〈신라 경문왕과 희랍의 미다스왕〉 등의 발표로 나타났으며, 〈불함문화론〉 등은 민속학적으로 주목되는 논문이다.
그는 단군을 건국의 시조인 개인이 아니라 원시사회의 신앙에 근거를 둔 종교적 제사장으로 이해하였다. 그가 불함문화권으로 주장한 동북아시아계의 여러 민족의 공통된 신앙, 즉 샤머니즘을 배경으로 단군신화를 이해하려고 한 것은 우리 신화와 문화에 대한 최초의 민속학적 연구 시도로 인정되고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활동으로 인하여 우리 민족문화운동사에 높은 봉우리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3·1운동으로 구금 투옥되고 나서 석방된 뒤 계속 일제의 감시·규제를 받아 친일의 길을 걸었다.
그리하여 식민지정책 수행 과정에서 생긴 한국사 연구기구인 조선사편수회에 관계를 가졌고, 이어 만주 건국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뿐만 아니라 일제 말기에는 침략전쟁을 미화, 선전하는 언론 활동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광복 후에는 민족정기를 강조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비난과 공격의 과녁이 되었다.
총체적으로 보면 유능한 계몽운동자였고, 우리 민족의 근대화 과정에 중요한 임무를 담당한 문화운동가의 한 사람이다. 죽은 뒤 1958년 말년에 기거한 서울 우이동 소원(素園)에 기념비가 세워졌고, 1975년 15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육당최남선전집≫이 간행되었다.
≪참고문헌≫ 六堂崔南善(趙容萬, 三中堂, 1964), 六堂崔南善全集(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玄岩社, 1975), 韓國의 民俗學硏究(李杜鉉, 韓國學入門, 學術院, 1983), 韓國近代詩史(金容稷, 학연사, 1986).
작품해설
1908년 11월에 창간된 『소년』의 권두시로 발표된 최남선의 시 작품.
신시(新詩) 혹은 신체시(新體詩) 등의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최남선의 운문 양식에 대한 집착은, 그가 지녔던 계몽 의식의 전달 방법에 대한 모색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그 변모 과정은 대개 (1)창가, (2)신시, (3)시조의 순을 따른다.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이 중 (2)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이 작품은 전 6연이며, 각 연은 모두 7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1연을 제외하고는 모두 의인화된 바다가 화자로 등장하여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될 소년들에게 부정적인 현실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끌고 나가 줄 것을 기대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1연에서는 화자의 입을 통하여 파도치는 바다의 위력적인 모습을 묘사하고, 2~4연에서는 권력자, 진시황, 나폴레옹, 부자 등 인간 세계에서 힘있는 척하는 것들의 왜소함을 비웃고, 5연에서는 인간 세상의 시비와 싸움, 더러움 등이 없어 하늘만이 바다의 짝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6연에서는 담 크고 순정(純情)한 소년들이 자기에게 와 안길 것을 바라면서 소년들을 부르고 있는 바다가 그려져 있다. 내용 면에서 드러나는 이 시의 특징은 한마디로 계몽성이라 할 수 있다.
계몽이 낡고 묵은 것을 타파하고 새로운 것에로 이끄는 것이라 볼 때, 이 시가 기존 질서에의 질타를 과녁으로 하고 있다거나 아직 기존의 세계에 물들지 않은 소년들에게 연대 의식을 나타낸다는 점등은 작가의 의지에 잘 부합한다고 보인다. 그러나 그 계몽이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실천 가능성으로 제시되지 않고 극단적인 현실부정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은 지적되어야 한다.
이 점은 시적 과장이라기보다는, 작품이 다소 비현실적인 관념적 사고 혹은 의식 과잉 위에 기초해 있다는 점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내용적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이 시의 바다 지향성인데, 시인은 ‘바다’로써 새로움을 향한 젊은 전진의 통로 혹은 근대적 문물과 정서를 지향하는 계몽의 표징으로 삼으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바다라는 자연물에 대한 전통적 이미지에 획기적 변화를 낳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형태적인 면에서 드러나는 이 시의 특징은 과도기적인 율격 실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 시가의 변모 과정을 ‘전통적인 시가→개화가사→창가→신(체)시→근대적 자유시’로 볼 때, 신(체)시가 놓이는 위치에서 짐작되듯이, 이 시는 한 연만을 떼어놓고 보면 4‧4조나 7‧5조 등의 정형적인 율격을 버리고 자유율에 상당히 접근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러 연을 함께 놓고 보면, 이 시는 각 연들 사이에 서로 대응되는 행의 길이나 구조가 똑같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각 연은 7행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연의 2‧4‧6행은 3‧4‧5의 자수율이 지켜지며 3행과 5행은 대부분 4‧3‧4‧5 혹은 4‧3‧4‧7로 글자수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각 연의 1행과 7행이 전부 파도소리의 의성어로 되어 있다는 점도 이 시의 형태적 고정성을 심화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 이런 점들을, 새로운 율격의 실험이라는 문학사적 의의로 인정할 수도 있겠지만, 끝내 실험으로 그쳐버리고 말았다는 점에서 과도기적 작가 의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표징으로 꼽을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