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속의 詩

지난 계절의 시 읽기

靑巖 2019. 12. 6. 00:33

지난 계절의 시 읽기

 

 

 

- 이화영, 「새를 만나다」(웹진 〈시인광장〉2019년6월호)

 

- 김왕노, 「낙과」(계간 〈문학과 사람〉2019년 여름호)

 

- 윤은경, 「사막장미」(계간 〈시와 경계〉2019년 여름호)

 

- 김정수, 「봄밤」(계간 〈시작〉2019년 여름호)

 

- 송영희, 「꽃 진 뒤에도 나는」(송영희 시집,『우리는 점점 모르는 사이가 되어가고』<2019, 시인동네>)

 

 

박완호(시인)

 

 

 

 

시를 쓰고 읽는 행위는 내가 그동안 놓치고 있던‘나’를 만나는 것이며, 나아가 일상 속에서 무수히 마주치는 타자들 가운데 존재하는 특별한 ‘너’를 겪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나’와 ‘너’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지닌 다양한 속성을 발견, 이를 바탕으로 그것이 지닌 본질을 깨닫고, 우리가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좋은 시가 지니는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는 독자에게 진정한‘나’를 마주치는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어느 곳에서도 ‘나’를, ‘너’를, ‘세계’를 마주치지 못한다면, 그러한 시 쓰기 또는 시 읽기에서 무슨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까. 운 좋게도 우리는 잊고 있던‘나’를 일깨워주고, ‘너’와의 마주침을 통해 우리가 어제보다 조금 더 의미 있는 오늘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그런 점에서‘좋은 시’라고 불러도 괜찮을 시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시의 독자인 우리에게는 참 다행스럽고도 즐거운 일이다.

 

 

 

 

새 울음이 들려와 빨래를 널었습니다

 

펄럭이는 자락이 작은 깃 같아서

 

가만 귀를 기울였습니다

 

 

다시 볼 수 없는 대상은 다정합니다

 

적당히 마른 야생의 문장은

 

빨래사람 짓을 합니다

 

 

새에게 안녕하고 인사를 한 날은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안녕이란 단어를 싫어하는 감정이 습관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안녕에게 정복당하고

 

안녕에게 정보를 얻는 시간입니다

 

 

새의 이니셜은 고독합니다

 

나는 빨래를 걷어

 

무생물에 감정을 더할 것입니다

 

 

빨래의 오른뺨에 대한 해석이 필요합니다

 

상처 있는 사과를

 

한 줄로 깎아 먹었습니다

 

 

동이 터 옵니다

 

새하얀 눈발 같은 노래가 쏟아집니다

 

며칠 빨래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 이화영, 「새를 만나다」(웹진 〈시인광장〉2019년 6월호)

 

 

 

 

어디선가 새 울음이 들려오는 것 같지만 새의 실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 시의‘새 울음’은“다시 볼 수 없는 대상”, 지금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누군가의 부재를 깨닫는 순간 느끼게 되는 어떤 존재에 대한 그리움이며, 빨랫줄에 걸린 빨래의 흔들림을‘사람 짓’으로 느낄 만큼 강렬한 감정이다. “적당히 마른 야생의 문장”이 내포하는 탁월한 절제는 ‘혼자’인 화자가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을 견디기 위한 적절한 선택으로 보이는데, “새에게 안녕하고 인사를 한 날”이면 느끼게 되는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안녕’이란 단어를 싫어하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할 만큼 그는 아직 누군가와 헤어져서 혼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은 단순히 불안하고 두려운 시간만은 아닌, “안녕에게 정복당하고 안녕에게 정보를 얻는 시간”, 즉 지독하리만치 아프면서도‘나’를 성숙하게 하는 때이기도 하다.

 

울음만 들릴 뿐 실체가 보이지 않는 존재인‘새’의 이니셜은 ‘나’의 고독을 더욱 깊어지게 할 뿐이다. 이때 “빨래를 걷어 무생물에 감정을” 더하는 화자의 행위는‘혼자인 나’를 어떻게든 견뎌내고자 하는 적극성을 내포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오른뺨에 대한 해석이 필요”한 ‘빨래’는 화자의 감정이 더해진 사물, 달리 말하면‘인간화된 존재’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이는 헤어짐, 분리된 상태인 화자를 떠올리게 하며, “상처 있는 사과를 한 줄로 깎아 먹”는 화자의 모습은 “빨래를 걷어 무생물에 감정을” 더하는 행위와 연결하여 고독이 내면화되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어낼 수 있다. 마지막 연의 “새하얀 눈발 같은 노래가 쏟아집니다”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빨래’를 하지 않아도 되는‘며칠’은 그가‘혼자인 나’를 견뎌낼 만한 날들이리라. 얼마 지나지 않아 불안하고 두려운‘고독’이 어김없이 그를 찾아오고, 어디서 들려오는 새 울음을 들으며 또다시 빨래를 널고 있을 그를 마주치겠지만.

 

이화영 시인의 「새를 만나다」는 인간 존재가 겪는 불안과 고독, 그리움이 내면화되는 과정을 통해 성숙해 가는 자아의 모습을 인상 깊게 그려내고 있다. 반복되는‘만남-헤어짐-만남’ 속에서 끊임없이 상처 입어가며 그만큼 성숙해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 아니겠는가. 시인은 독특하면서도 절제된 비유와 수사가 담긴 한 편의 시를 통해 그것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때 떫었다는 것은

 

네게도 엄연히 꽃 시절이 있었다는 것

 

네가 환희로 꽃 필 때 꽃 피지 못한 것이

 

어디나 있어 너는 영광스러웠던 것

 

너를 익히려 속까지 들이차는 햇살에

 

한때 고통으로 전율했다는 것

 

익지 않고 떨어진 낙과를 본다.

 

숱한 네 꿈을 꼭지째 뚝 따버린 것이

 

미친 돌개바람 탓이기도 하지만

 

꼭지가 견디지 못하도록

 

스스로 가진 과욕의 무게 때문

 

한때 나도 너와 같은 푸른 낙과였다

 

 

- 김왕노, 「낙과」(〈문학과 사람〉2019년 여름호)

 

 

 

 

거칠고 긴 호흡의 언어를 통해 개성적인 시 세계를 펼쳐온 김왕노 시인은 「낙과」에서 지금까지 보여준 것들과는 상당히 달라진 성격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이 시에서 ‘꽃’이나‘꽃 시절’은 일반적으로 쓰이는 것과는 달리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데, ‘만개’가 아닌 ‘결실’로 가는 과정으로서의 ‘꽃 핌’은 환희, 영광의 순간을 가리키는 동시에 네가‘한때 떫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꽃 핌’이 갖는 성격은 ‘꽃 피지 못한’과의 대비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나타나며, 그것은 영광스러운 순간이면서도‘속까지 들이차는 햇살에 고통으로 전율’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한 ‘전율의 고통’은 ‘성숙’으로 가는 통과 의례의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화자가 바라보는 대상인 ‘너’는 “익지 않고 떨어진 낙과”이며, 그것은 꾸고 있던 숱한 ‘꿈’의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어느 순간‘꼭지째’ 떨어지고만 ‘설익은’ 존재이다. 그렇게“숱한 네 꿈을 꼭지째 뚝 따버린 것”은 다름 아닌‘너’의 안팎에 존재하는‘미친 돌개바람(바깥)’과 ‘스스로 가진 과욕의 무게(안)’ 이다. ‘미친 돌개바람 탓이기도 하지만’에서 볼 수 있듯, 화자는‘돌개바람’보다‘스스로 가진 과욕’이 직접적인 원인임을 간파해내는데, 그것은 결국 정작 중요한 것은 바깥(외부)이 아닌 ‘너’의 안(내부)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것은‘나’ 또한 ‘너’와 마찬가지로 한때‘푸른 낙과’였다는 점이다. ‘한때’라는 부사어는 과거와 달리 지금은 자신이‘과욕’을 비워낸 상태(그곳은 지금 그가 서 있는 자리라기보다는 그의 꿈이 가리키는 먼 지점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임을 드러내는데, ‘나’를 ‘너’를 바라보는 관찰자인 동시에 ‘너’라는 존재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 시에서 ‘나’의‘자기반성’을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때의‘과욕’을 버리고 성숙한 존재가 되어 지금의 자리에 서 있는 화자처럼, 우리 또한 각자의‘설익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깊이 있는 성찰을 통해 언젠가 조금 더 성숙해진 ‘나’를 마주치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아무도 모래를, 부축할 수 없다 모래는 모래의 어깨를 겯고 모래를 디디며 모래의 노래를 부르며 갈 뿐

 

 

모래 사이에서 몸을 일으킨 바람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백만 년의 바다의 기억과 고독과 거칠고 메마른 침묵의 무게를,

 

 

모래 속으로 흘러가 꽃귀를 여는 모래여 터진 물집으로 타박타박 걸어가는, 낙타의 긴 속눈썹이 뜯어먹는 꽃이여 죽음으로 죽음을 싱싱하게 꽃피워 이름을 얻은 한 송이 돌, 하나의 사막

 

긴 팔 벌려 꽃잎 하나를 내어놓고,

 

 

바람이 나를 스쳐 모래의 세월 속으로 파고든다

 

사막장미는 뿌리가 뽑히지 않는다

 

 

 

 

윤은경, 「사막장미」(〈시와 경계〉2019년 여름호)

 

 

 

 

‘나’를 성찰할 수 있는 자리는 누구에게나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다. 그 자리에 서기까지 그는 얼마나 멀고 험한 길을 걸어와야 했는지 모른다. 윤은경 시인의 「사막장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홀로, 끝까지 걸어가는 인간 존재가 마주한 삶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아무도 부축할 수 없는, 자기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존재인‘모래’는 화자가 추구하는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데, “모래는 모래의 어깨를 겯고 모래를 디디며 모래의 노래를 부르며 갈 뿐”에서 볼 수 있듯, 그는 자기의 길을 ‘홀로’‘끝까지’ 걸어가는 철저하게 고독한 존재이다. 그것은 “백만 년의 바다의 기억과 고독과 거칠고 메마른 침묵의 무게”를 지닌 ‘모래’의 이미지와 겹쳐지면서 강렬하면서도 매력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모래 사이에서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보는‘바람’과 ‘모래’는 서로 다른 존재이면서 분리될 수 없는 성격을 지니는데, 그 둘은 어떤 의미에서 ‘같은 본질을 지닌 두 존재’ 또는‘한 존재의 다른 이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볼 때‘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는 자리는“터진 물집으로 타박타박 걸어가는 낙타”처럼 험난하고도 먼 삶의 여정을 감당하고 나서야 겨우 다다를 수 있는 어떤 지점인 것이다. 그곳에서‘나’는 비로소‘꽃귀를 여는 모래’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낸 낙타의 긴 속눈썹이 뜯어먹는‘꽃’을, “죽음으로 죽음을 싱싱하게 꽃피워 이름을 얻은 한 송이 돌”, 이 시의 제목이기도 한‘사막장미’를 마주하게 된다(이 시에 나오는‘사막장미’는‘사막의 장미(Desert Rose)’라는 이름을 가진 석고의 결정체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가 흔히 사막의 장미라고 부르는 쌍떡잎식물인‘아데니움(Adenium)’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렇게 마주친‘한 송이 돌’은 그 자체로‘하나의 사막’이기도 하며, 그것은 오랜 고독과 침묵 끝에 가까스로 피워 올린 아름다운 결정체로서‘사막장미’라는 매혹적인 이름을 갖고 사막 속에 피어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이 시는 ‘모래’가 지니는 존재론적 의미를 바탕으로 화자가 간직한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읽어낼 수 있는데, 그런 맥락에서‘사막장미’는 시인이 오랜 고독과 침묵을 거치며 힘들게 꽃피워낸 결실인‘한 편의 詩’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시인의 길이란 결국 터진 물집으로 타박타박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걸음처럼, 어느 순간 ‘사막장미’처럼 아름다운 한 편의 시를 마주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파고드는 고독자의 행로를 끝까지 감당하는 것이다. 긴 팔 벌려 꽃잎 하나를 내어놓은 바람이 나를 스쳐 모래의 세월 속으로 파고들면, 또다시 백만 년의 바다의 기억과 고독과 거칠고 메마른 침묵의 무게를 감당하고 나서야 마침내 또 하나의‘사막장미’를 마주치게 되듯, 시인 역시 그만큼의 세월과 고통을 다 견뎌내고 나서야 그토록 꿈꿔온 한 편의 시를 꽃피우게 될 것이므로.

 

 

 

 

꽃 진 뒤에도 나는, 알지 못했네

 

그게 빨강인 줄을

 

막다름인 줄을,

 

마음인 줄을 몰랐네

 

 

나는 고달픈 내 무릎만을 사랑했네

 

새벽의 기도만을 사랑했네

 

 

나무들이여

 

찰랑찰랑 푸른 잎을 달고 있는 나무들이여

 

그 잎 다 떨군 나무들이여

 

 

한 잎의 눈뜸을

 

한 잎의 뒤척임을

 

한 잎의 시들음을

 

한 잎의 하늘을 다 품었던 나무들이여

 

 

나는 끝없이 미래만을 사랑했네

 

시를 쓰면서도 나는

 

사랑의 마음을 모르고 있었네

 

 

단 한 줄의 마음이 어떻게 내게 왔는지

 

어디서 오래 머물다 어떻게 모래가 되어 흘러갔는지

 

 

오직 나는 내 가여운 손만을 사랑하고 있었네

 

손을 따라 움직이는 내 마음만을 사랑하고 있었네

 

 

당신의 두 손만 간절히 그리워하고 있었네

 

 

아직 당신을 사랑하지 못하네

 

하얗게 슬프네

 

 

송영희, 「꽃 진 뒤에도 나는」(『우리는 점점 모르는 사이가 되어가고』 〈2019,시인동네〉)

 

 

 

 

송영희 시인의 「꽃 진 뒤에도 나는」을 읽는 동안 나는 어느샌가“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빨강-막다름-마음’으로 이어지는 의미의 연결고리는 이 시의 화자가 서 있는 삶의 지점이 어디쯤인가를 짐작하게 해준다. “찰랑찰랑 푸른 잎을 달고 있는 나무들”,‘꽃 핀’ 시간을 건너 지금의 자리에 선 화자는‘그 잎 다 떨군 나무들’을 보며 지나온 시절의 ‘나’를 돌이켜보는 것이다. 그러한 자아 성찰을 통해 그는 ‘고달픈 내 무릎’과‘새벽의 기도’만을 사랑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떠올리며, 너무나도 이기적이었던‘나’를 반성하는 중이다. “한 잎의 눈뜸을 / 한 잎의 뒤척임을 / 한 잎의 시들음을 / 한 잎의 하늘을” 다 품었던 나무들은 그와는 다른 속성과 가치를 지닌 존재로, 화자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고 나아가‘시를 쓰면서도 사랑의 마음을 모르고’ 있던 ‘나’의 부끄러움을 일깨워준다. “한 잎의 눈뜸을 / 한 잎의 뒤척임을 / 한 잎의 시들음을 / 한 잎의 하늘을 다 품”는 것은 다름 아닌‘사랑의 마음’으로, 시인이 마땅히 지녀야 하는 마음가짐을 가리킨다.

 

그“단 한 줄의 마음”이 어떻게 내게 와서 어디서 머물다 어떻게 모래가 되어 흘러갔는지 모르고, ‘내 가여운 손’, ‘손을 따라 움직이는 내 마음’만을 사랑하면서도 ‘당신의 두 손만 간절히 그리워’하던 지난날의‘나’를 통해 우리는 받는 것에만 집착할 뿐 주는 것에는 너무나도 인색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진정한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를 고민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가 서 있는 자리는 삶의 끝자락이 아니라, 많이 늦기는 해도 다시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는 지점이다. 잎을 다 떨구었던 나무들이 봄이 되면 다시 꽃을 피우고 푸른 잎을 달게 되듯, 우리의 삶도 숨이 멎는 순간까지는 아직은 어느 것도 마지막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 당신을 사랑하지 못하네”라는 화자의 고백이 슬프게만 읽히지 않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으리라.

 

 

 

 

유장한 이야기 범람하는 강변은 말고

 

부산한 파도소리 폭풍의 해안도 말고

 

 

조곤조곤 당신을 들어주기에는

 

봄밤의 시냇가가

 

적당하다

 

 

내 몸에서 당신은 조그맣게 흐른다

 

 

- 김정수, 「봄밤」(〈시작〉2019년 여름호)

 

 

 

 

김정수 시인의 「봄밤」은 앞에서 말한 ‘진정한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그만의 대답을 들려준다. 시인이 말하는 사랑은 한 마디로‘나’를 들려주는 게 아니라 ‘당신’을 들어주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은 말로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참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사람끼리는 말할 것도 없다.

 

‘당신’과 나란히 시냇가에 앉아 있는 이 순간, 어디선가 봄꽃들이 닫혀 있던 봉오리를 소리 없이 열고 있으리라. 일상이라는 시공간을 나란히 겪는, 있는 듯 없는 듯 언제나 나와 함께하는 하나뿐인 사람. ‘내 몸에서 조그맣게 흐르는 당신’처럼 내 안을 흐르는 사랑의 물줄기 또한 모든 순간 당신이 있는 쪽으로만 흘러가고 있음을 아는지. 지금은 말없이도 우리가 서로를 듣는, 시냇가에 나란히 앉아 ‘조그맣고 오래된’ 사랑을 꿈꾸는 시간이다. 이 시는‘부산한 파도 소리’,‘유장한 이야기’처럼 귀를 피곤하게 만드는 언어들이 범람하는 현실 속에 서 있는 우리에게 조곤조곤 들려오는‘당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특별한 자리를 마련해준다. 당신의 말소리와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한 줄기가 되어 내 속을 흐르는 찰나 당신과 나, 봄밤의 시냇가까지도‘하나’가 되어 소리 없이 반짝이게 되리라. 누군가의 말처럼 이 순간의‘당신’과 ‘나’는 탁월한 ‘사랑의 발명가’들인 것이다.

 

 

한 편의 시를 읽는 일은 모르고 있던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며, 그것을 통해 진정한‘나’를 만나는 것이기도 하다. 거꾸로 그것은‘나’를 통해 어느 순간 특별해진 ‘너’를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지금 이곳에 없는 대상을 떠올리며 ‘혼자인 나’를 깨닫고 견디면서 성숙해 가는 자신을 발견(이화영)하거나, 부질없는 욕망 때문에 여물기도 전에 꼭지째 떨어져 내린 꿈의 기억을 통해 지난날의‘나’를 돌이켜보며 그때와는 달라진 자신을 마주치고(김왕노), “죽음으로 죽음을 싱싱하게 꽃피워 이름을 얻은 한 송이 돌”을 꿈꾸며 터진 물집으로 타박타박 모래를 걸어가는 낙타를 통해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찾아내기도 하며(윤은경), 잎 다 떨군 나무들을 바라보며‘아직 당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깨닫고 ‘하얗게 슬퍼하는’‘나’를 통해 진정한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되묻는(송영희) 한편, ‘내 몸에서 조그맣게 흐르는 당신’을 조곤조곤 들어주며 봄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나는 사랑을 발명(김정수)하기도 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시 읽기가 주는 즐거움은 아닐까 하고 천천히 곱씹어가며 ‘나’를 들여다보는 이 순간. 지금은 내가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슬프고도 행복한 시간이다.

 

 

 

- [시와 경계] 2019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