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그릇
밥그릇
— 정호승
개가 밥을 다 먹고
빈 밥그릇의 밑바닥을 핥고 또 핥는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몇 번 핥다가 그만둘까 싶었으나
혓바닥으로 씩씩하게 조금도 지치지 않고
수백 번은 더 핥는다
나는 언제 저토록 열심히
내 밥그릇을 핥아보았나
밥그릇의 밑바닥까지 먹어보았나
개는 내가 먹다 남긴 밥을
언제나 싫어하는 기색 없이 다 먹었으나
나는 언제 개가 먹다 남긴 밥을
맛있게 먹어보았나
개가 핥던 밥그릇을 나도 핥는다
그릇에도 맛이 있다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그릇의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그랬던가.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인생이란 참 오묘한 것이어서 삶의 밑바닥을 경험한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의 삶을 논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정호승의 시 <밥그릇>을 읽다 보면 문득 괴테가 말한 ‘눈물 젖은 빵’이 떠오른다. 눈물 젖은 빵을 먹는 대신 시 속에서는 ‘밥그릇 밑바닥 핥기’가 나온다.
애완견은 잘 모르겠지만, 가축으로서의 개를 키워본 사람이면 다들 한 번쯤은 봐서 알 것이다. ‘개가 밥을 다 먹고 / 빈 밥그릇의 밑바닥을 핥고 또 핥는다’ 어쩌면 그만큼 배가 고팠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많이 줘도 개들은 밥그릇 밑바닥을 정말 깨끗하게 핥아 먹는다. 정말이지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대개가 ‘몇 번 핥다가 그만둘까’ 생각을 하지만 ‘혓바닥으로 씩씩하게 조금도 지치지 않고 / 수백 번은 더 핥는다.’
개가 밥그릇을 핥는 행위는 어찌 보면 동물의 본능일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개의 그러한 행동을 예사로 바라보지 않는다. 개의 행동을 보면서 ‘나는 언제 저토록 열심히 / 내 밥그릇을 핥아보았나 / 밥그릇의 밑바닥까지 먹어보았나’를 생각한다. 이쯤에서 독자들은 눈치를 챈다. 시인이 말하는 개의 그 행위가 단순히 밥그릇 밑바닥 핥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 밥그릇 밑바닥을 핥는 행위는 그만큼 치열하게 살아내려는 노력이리라.
시인은 역할을 바꿔 다시 생각한다. ‘개는 내가 먹다 남긴 밥을 / 언제나 싫어하는 기색 없이 다 먹었’다. 당연한 일이다. 사람이 먹다 남은 밥찌꺼기를 개들이 먹는다. 그러나 ‘나는 언제 개가 먹다 남긴 밥을 / 맛있게 먹어보았나’고 자문한다. 결코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 개 밥그릇 밑바닥을 핥는다 -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할 것이다.
여기서 시인은 감히 행동으로 옮긴다. 바로 ‘개가 핥던 밥그릇을 나도 핥는다’고 한다. 개처럼 나도 내 밥그릇을 핥는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정말로 개밥그릇을 핥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진위 여부를 떠나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릇에도 맛이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 그릇의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밥그릇이란 무엇일까. 밥이란 생존의 가장 원초적인 재료이고 그 재료를 담는 밥그릇은 우리들의 하루 세 끼 식량을 담아 먹는 도구이다. 그렇다면 그 그릇의 밑바닥은 삶의 가장 밑바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맛있다고 할 수밖에. 그것도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그릇의 밑바닥이라면 어찌 맛이 없겠는가.
삶의 가장 밑바닥을 경험한 사람 - 그의 경륜이 ‘맛있다’고 표현된 것이고, 그런 경륜을 가진 사람이 되려는 시인의 깨달음이 아니겠는가. 치열한 삶의 자세 - 바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리라. 그러고 보면 표현한 단어만 달랐지 정 시인이 괴테의 반열에 올랐나 보다. 시인의 통찰력이 부럽기만 하다.
출처: blog 현산 이병렬 서재/내가 읽은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