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치전투 위령탑
우금치전투 위령탑(동학농민군 위령탑)
1973년 건립된 우금티 위령탑은 당시 천도교 공주교구장이었던 이창덕 씨를 중심으로 건립위원회를 꾸려 만들었다. 100여 ㎡ 부지에 황토현기념탑을 닮은 8m 높이 위령탑의 비문은 동학농민혁명이 5.16과 10월유신으로 이어진다고 새겼다.
사진: 강수경의 시詩 마실블로그
사진: 흥미진진공주 공식블로그
우금치
충청남도 공주시 금학동과 주미동 사이에 있는 고개로서
우금치는 공주 남쪽을 지키는 관문이었으며, 동학운동 때 관군과 싸워 동학 농민군 10만 명이 전사한 역사적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우금치는 우금(牛禁)과 우금(牛金)이라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옛날에 도둑이 많이 있어서 해가 저물었을 때 소를 끌고 고개를 넘어가면 도둑들한테 소를 빼앗긴다고 해서 관에서 해가 지고 나서는 소를 몰고 고개를 못 넘게 했다 하여 우금(牛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다른 해석은 금송아지가 나왔다고 해서 우금(牛金)이라고 불렀다 한다
우금치는 공주시청에서 부여 방면으로 가는 길에 있는 고개로 현재는 터널이 건설되어 있으며 그 위로 생태 통로가 건설되어 있다. 공주시청에서 2㎞ 정도 떨어져 있고 4차선 도로가 뚫려 있어 접근성은 매우 좋다. 근방에 우금치 전적지와 동학혁명위령탑이 있다. 공주시내에서 이인면 방면으로 고개를 넘어 가면 국도 40호선과 만난다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우금치전투는
1894년(고종 31) 11월 공주 우금치에서 벌어진 동학농민군과 조선·일본 연합군 간의 전투이다
2차례의 공주전투에서 수천 명의 농민군이 숨졌던 우금티의 피어린 역사가 위령탑에 상징적으로 새겨져 있다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정읍 황토현 전승지와 전주성 점령이 빛이라면 공주 우금티는 그림자다. 서울을 향해 진군하던 동학농민군이 당시 충청도 수부였던 공주감영을 점령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결집했으나 한일연합군의 벽을 넘지 못하고 처참하게 무너졌던 곳이 바로 이 우금티였다.
우금티의 그림자는 오늘에까지 역사적 상흔을 안은 채 길고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농민군이 우금고개를 넘지 못하고 혁명의 꿈을 고개에 묻었듯이, 공주에서 그 혁명의 역사는 오늘날도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해 보였다. 최대의 격전지를 연상시킬 수 있는 기념시설도, 선양사업도 지역사회의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나마 농민군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제를 중심으로 매년 열리는 추모예술제가 공주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존재감을 알리고 있었다.(2014.8.6 전북일보)
원효사는 72년도에 지어졌고, 우금티 전적지가 만들어진 시기는 73년도에 공주의 천도교인 이창덕씨가 주도하여 세워졌으므로 원효사와 우금티는 함께 가야 하는 숙명인가 합니다.
이창덕씨는 봉황초등학교 앞에서 직조공장을 하던 분인데, 당시로써는 아주 어려운 마음을 내어 동학혁명탑을 세웠다고 설명에 나옵니다. 이창덕씨의 딸이 우리들과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기에 더욱 새롭습니다.
공주는 앞으로 우금티 전적지를 새로운 광광의 자원으로 잘 활용하여 더욱 빛나는 문화의 발전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공산에 있는 공산성과 송산에 있는 송산리 고분군 등은 이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거니와 근대 개화기 역사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동학농민운동사를 재조명 하는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발원합니다.(2018.6.19특급뉴스)
농민운동의 대두
봉건체제와 그의 붕괴과정 속에서 농민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는데, 효시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그 전에도 봉건적 압제에 대하여 항쟁하였지만 그것은 민란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민란은 그 자체가 목표하는 사회적 이념 없이 감정적이고 자연발생적인 반항으로서, 고대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있었던 일이다.
동학농민혁명운동
농민이 농민의 권익을 위하여 조직적으로 전개하는 사회경제운동이다.
농민은 농토 위에 생존하기 때문에 농민의 권익 가운데 농토의 소유와 농산물의 분배상 권익이 기본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농토의 소유와 농산물의 분배에 있어, 농민 또는 농업 이외의 다른 이유에 의하여 모순이 생기면 그 모순의 배제와 시정을 위하여, 농민은 힘을 결집하여 조직적으로 대항하게 된다.
농민은 오랫동안 농업 이외의 이유로 구속되어 왔다. 농민은 고대나 중세사회에서 봉건적 이유로 농토도 갖지 못하고 농산물도 마음대로 갖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농민은 이러한 모순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근대사회가 태동하면서, 우리 나라의 경우 양반봉건사회가 무너지면서 농민은 봉건적 모순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각한 농민이 집단을 이루어 봉건적 모순에 저항하며 개혁운동을 폈으니 이것이 농민운동의 출발이다.
농민이란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시대의 제3계급인 농공상에 종사하던 상민(常民) 중의 하나이다. 상민은 양반과 중인 다음의 신분계급으로 사회적 구실로 보면 생산담당계층이었다. 상민 다음에는 천민이 있었다. 그런데 천민 가운데의 노비들은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독립된 농가를 갖게 되는 경우가 증대하여 농민화되어갔다.
즉, 공사노비로서 자식을 가지게 되면서 노비의 수가 증가하자 노비출신이지만 노비생활을 하지 않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가령 노비인 부모는 주인의 토지를 얻어 자식들을 농민으로 키워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상민과 노비는 실제를 구별할 필요없이 상놈[常漢]으로 통칭되고 있었다.
한편, 양반이나 중인에서도 경제적으로 몰락한 잔반(殘班) 등의 농민이 있어 조선 후기에는 농민의 수가 전체 인구의 9할에 가까웠다. 그 9할의 농민이 봉건적 사회경제체제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동학교는 발생부터 사회사적 측면에서는 농민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동학교운동을 통틀어 동학농민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1894년의 것만을 가리킬 때는 동학농민혁명운동이라 하는데, 이 운동은 내용의 변화에 따라서 다섯 단계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첫째는 전봉준(全琫準)을 선두로 한 고부민란의 단계로서 이것은 익산민란과 같은 성격이었다.
둘째는 동학교조직이 합세하여 관군에 항거하면서 전주를 점령할 때까지의 일로서 여기에서 동학농민혁명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셋째는 전주화약(全州和約) 이후 집강소(執綱所) 통치기간으로서 전라도에서나마 농민의 혁명이념이 실현되어가던 기간이었다.
넷째는 혁명전쟁이 전개되던 기간으로 그 해 10월 동학혁명군을 탄압하는 일본군에 대항한 혁명전쟁을 일으켜 북진한 동학농민군이 12월 우금치(牛金峙)에서 패퇴할 때까지의 일이다.
다섯째는 12월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패퇴한 농민군이 곳곳에서 항전한 기간으로 일본침략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무참하게 학살된 기간이었다.
여기에서 셋째 단계까지가 혁명운동 기간이었고, 넷째와 다섯째의 단계는 혁명전쟁 기간이었는데 이를 전기와 후기로도 나눈다.
혁명전쟁이란 혁명의 진행과정에서 반혁명적 외국군(일본군)의 침입이 있을 때, 혁명군이 혁명의 완성을 위하여 침략군과 벌이는 전쟁을 말한다. 이러한 동학농민혁명운동은 12개 조의 폐정개혁안 즉, 농촌의 혁명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농민운동사적 의미가 크며 농민운동을 본격화한 점, 집강소 통치를 시도한 점, 혁명전쟁으로까지 항전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출처:네이버지식백과 [農民運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역사] 공주 우금치 고개 동학군 위령탑에 흔적 남긴 사람
https://m.pressian.com/m/pages/articles/2021051317230656292
다음은 탑비 앞면의 전문입니다.
인내천과 사민평등의 종지아래 후천개벽의 혁명정신으로 무장하고 동학교주 전봉준이 호남의 만석보 기슭에서 수천의 농민군을 편성하여 첫 봉화를 든 것은 갑오(서기 1894년) 정월 10일. 20일께는 다시 대거하여 백산을 점거하고 습격해오는 관군을 격파하면서 승승장구 .4월말에는 전주성까지 함락하게 되니 혁명의 성공이 눈앞에 다가오는 듯하였다.
그러나 청일 양국의 무력간섭 아래 이 나라의 국권마저 위협받게 되자 정부 측이 먼저 화해하기를 청하니 우국애민의 일념에서 동학군은 마침내 양보하여 전주성을 내어주고 그 여력을 지방 조직에만 기울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군국주의 일제의 엄청난 야욕은 돌연 남의 나라 주권을 침해 독점하고자 날뛰게 되니 정녕 국가의 명맥이 통틀어 풍전등화가 되고 말았다. 이에 한동안 후퇴했던 동학군은 드디어 항일 구국의 독립군으로 재무장하고 총궐기하였다,
남북접이 호응 합세하여 20만의 대병력을 논산평야로 집결시키고, 전봉준과 손병희 두 통령의 작전지휘아래 서울까지 진격하는 주요거점으로 공주성부터 공략하게 되었다.
그 결과 10월 하순부터 전개된 공주성의 대공방전은 이 우금치를 중심으로 날이 갈수록 처참하고 가열하게 됐다. 한 고지의 주인을 4.50차례나 바꾸어 가면서 세계전사에 유례없는 격전을 되풀이하였다.
그리하다가 새로 투입된 일본군의 증원부대가 근대의 무서운 살인무기 기관총으로 연속 맹사격을 퍼 붓게 되니 악전고투하기 3일 만에 동학군은 막대한 희생자를 내인 채 전우들의 시산혈하를 넘어서 11월 11일 논산방면으로 철수하였다.
대망의 혁명 사업이 여기서 좌절당하고 계속되는 추격과 살육 속에 위국단침조차 알아줄 이 없었다.
그러나 님들이 가신지 80년 .5.16 혁명 이래의 신생조국이 새삼 동학혁명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시월 유신의 한 돌을 보내게 된 만큼 우리 모두가 피어린 이 언덕에 잠든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하여 이 탑을 세우노니 오가는 천만대의 후손들이여 그 위대한 혁명정신을 영원무궁토록 이어받아 힘차게 선양하라.
서기 1973.11.11
제자 대통령 박정희
글 문학박사 이선근
글씨 양재한
동학혁명 위령탑 건립위원회 세움
뒷면에는 감사문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이 나라 이민족을 도탄에서 건져내는 동시에 이미 혼탁해진 조정을 과감하게 바로잡고 보국안민의 대업을 이룩하기 위하여 이 내 목숨을 아낌없이 바친 동학혁명군의 10여만 영령들을 달래고자 이 고장 공주의 갸륵한 이창덕 동덕이 누구보다 앞장서 온 정성을 바치게 되니 천도교 중앙총부는 그 뜻을 더욱 널리 펴서 성취시키기로 결정하고, 금년 6월 25일 이선근 박사를 위원장으로 동학혁명군 위령탑건립위원회를 조직한 다음, 이 사실을 삼가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 품신하였던바 대통령 각하께서는 위원회가 앙청한 명예위원장과 제자의 휘호를 기꺼이 수락하시고, 특히 금일봉까지 하사하시어 이일의 거국적인 의의를 더욱 빛내주시었다.
여기에 이 고장 공주의 관민 여러분과 전국 각지의 뜻있는 인사들과 동학의 후예인 천도교인들이 물심양면으로 알뜰한 정성을 모아서 일찌기 혁명군의 마지막 결전장이었던 공주읍 우금치 이 자리에 위령탑을 세우기로 마련하고, 지난 9월 21일 기공한지 50일 만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일을 위하여 크게 진념해주신 박정희 대통령 각하와 회무발전을 보살피며 탑문을 지어주신 이선근 박사는 물론이요, 이 탑의 설계 감수를 맡아주신 정인국교수와 글씨를 써주신 양재한 동덕 여러분께도 우리 천도교를 대표하여 충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해둔다.
포덕 114년 11월 11일 천도교 교령 최덕신 심고
이상이 탑 비문 앞뒤의 전문입니다. 비문에 나오는 대통령 박정희라든지, 시월유신 5.16혁명 등 글자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정으로 훼손된 상태이고, 천도교 교령 최덕신은 훗날 월북을 하게 되는 인물입니다.
비문의 내용이 좋다 하여도 한자가 섞여 있으므로 해서 요즘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무용지물에 가까운 비문의 내용인지라 비석을 교체할 수 없다면 안내판에 한글로 새로이 적어서 옆에다 설치해 놓을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우리 절에서는 10월 3일 우금치에서 모실 영산재에는 영가들을 위하여 일만 벌의 영가 옷을 접어서 제작하기로 하고 종이를 이미 맞추어 두었으니 가까운 시일 내로 공주시내 불자들에게 적당히 나누어 드리고, 종이 바지저고리를 만들게 하여 당일 재를 모신 후에 소각하여 올리려고 합니다. (출처: 2013.6.15특급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