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역병 이후 쪼개진 中민심…다른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중국 비판적 지식인이자 반체제 소설가로 꼽히는 옌롄커(閻連科·62)가 문우이자 번역가인 김태성 한성문화연구소 대표를 통해 매일경제신문에 긴 기고문을 보내왔습니다. 코로나19 시대, 관용의 인류애와 혹독한 향후 과제를 짚는 글입니다. 악몽과 같은 전염병의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이 담겼다고 판단해 옌롄커 작가의 기고 전문(全文)을 싣습니다. 원고의 압축본은 4월 2일자 매일경제신문 지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옌롄커 기고 원문 전체
나는 뉴스에 이상할 정도로 둔감한 사람이다. 뉴스에 대한 무관심이 나의 생활에 또 다른 진실감을 가져다준다. 외부 세계와의 연결은 주로 아침저녁으로 식탁과 커피숍에서 핸드폰 SNS과의 단속(斷續)적인 접속에 의존하는 편이다. 하지만 코로나19 감염증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감염의학 전문가 종난산이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파된다"라고 말한 뒤에도 그것이 얼마나 무섭고 대단한 것인지 실감하지 못했다. 그가 중국중앙텔레비전방송국(CCTV)에서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파된다"라고 말했다면 이미 어느 정도 결과를 예상하고 있고 통제가 가능하다는 판단이 섰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통제가 불가능했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이어 우한이라는 도시 전체가 봉쇄되었다는 소식이 지진처럼 전해져 왔고, 황망히 우한에 있는 친구나 학생들과 연락을 취해 그들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역병의 상황이 이미 통제 범위를 넘은 폭발 수준이고, 우한이 이미 지옥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뜻밖에도 그 직전까지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쓰나미가 닥칠 때도 예비 징조가 있기 마련이지만 이번 우한 사태와 관련해서는 외부 세계의 미세한 바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정말로 무서운 일이었다. 음력 정월 30일부터는 매일 새로운 소식을 기다리면서 텔레비전 뉴스에서 눈을 뗄 수 없었고 손에서 핸드폰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2002년에는 또 다른 괴질 사스(SARS)가 있었다. 그때 나는 베이징에 있었다. 당시에는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매체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리원량을 비롯한 여덟 명의 의사들이 강제로 훈계서를 써야 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또 얼마 뒤에는 그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 마음속 믿음이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믿음이란 것이 완전히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매일 저녁 CCTV의 뉴스에 시선을 고정시킨 적이 없었다. 동시에 나는 쉴 새 없이 핸드폰을 주시했다. SNS를 통해 들어오는 갖가지 소식들이 내게 사태의 디테일과 진실감을 전해주었다. 17년 전 사스에 비하면 코로나19의 발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를 추적하고 규명하는 일은 과학자들의 몫일 것이다. 그 외의 모든 추측은 무의미하다. 다만 그 폭발의 과정은 정확하게 사스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어 사람들에게 한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사람들은 긴 탄식 속에서 무력감에 빠져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생각에 잠겨보지만 할 말이 없다. 사스는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이번 우한사태 같은 분열과 괴리를 가져다주지 않았다. 당시에는 중국 경제가 안정적이었고 사람들의 마음도 개방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중국인들의 마음이 철저하게 붕괴되고 분열되었다. 인심(人心)은 단순히 관방(官房)과 민간이라는 두 가지 사회, 두 공간으로만 규정할 수 없다. 거대한 도자기 접시가 하늘에서 떨어져 산산조각 난 것처럼 현실에는 무수히 많은 사회와 공간들이 존재한다. 이런 분열과 붕괴가 코로나19 이후 중국인들에게 최대의 정신적 후유증으로 남게 되었다. 애국주의와 서양숭배, 노예근성과 독립사고, 좌파와 우파, 친정부와 반정부, 분노하는 청년과 침묵하는 다수가 전부 이 무수한 파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사스 때도 사람들의 생각이 분열되었지만 곧 봉합될 수 있었던 원인이 표면적으로는 그 직후에 이어진 시끌벅적한 올림픽인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생각해보면 오늘날보다 더 거센 기세로 하루가 다르게 열기를 더했던 경제성장 덕분이었다. 경제발전이 중국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뭉치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제가 이제는 이미 큰 폭으로 위축되기 시작했다. 역병이 물러간 뒤에 우리는 어떤 방법과 사상으로 한때 거대했지만 이미 무수한 파편으로 조각난 도자기 접시를 이어붙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리원량이 세상을 떠난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펜을 들어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는 아주 감동적인 작품들도 적지 않다. 대단히 칭찬할 만한 일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가운데 그다지 추상적이지 않은 몇몇 작품들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예컨대 한 익명의 간호사가 쓴 이런 시가 있었다. "재난으로 죽은 집안은/ 전부 연기가 되어 날아갈까요?/ 화장터를 떠도는 그 핸드폰들은/ 주인을 찾았을까요?"
또 상하이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장즈하오가 쓴 `무제`라는 시도 있다.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깨어/ 귀 기울이고 자세히 세상의 적막을 듣는다/ 밤과 낮이/ 어떻게 비슷할 수 있겠는가/ 백동전 하나가/ 얼음처럼 차가운 물속에 잠긴 것처럼/ 앞뒤 양면이 흐릿하다/ 유일하게 가장 가난한 사람만이/ 소원의 연못 바닥을 향해 손을 더듬어 갈 것이다." 그의 또 다른 시 `입속의 고통`에서는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사람은 입 안에 한 가지 쓴 맛이 있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으면/ 이 쓴 맛이 열매로 변한다/ 쓸개처럼/ 어둠을 머금고/ 어둠 속에서 떨고 있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런 시구들을 읽으며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몸을 떤다. 이런 시구들이 나중에 고전으로 남게 될지의 여부는 시간이 결정하겠지만 이 시구들이 그들의 혈류와 영혼에서 흘러나온 것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문학계에는 특이한 일도 있었다. 우한 시인 샤오인이 도시가 봉쇄된 동안 시를 쓰지 않고 매일 일기를 쓴 것이다. 그의 일기와 팡팡(方方)의 일기는 나중에 코로나19 감염증의 가장 자세한 문학적 기록이 될 것이고 이번 역병재난에 대한 기억의 화석이 될 것이다.
이런 문학현상은 현상이라기보다는 고독의 소리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혹은 이 시대 시인들의 이슬비처럼 처량한 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의 언어 환경에서는 문학의 의미를 얘기한다는 것이 시기상조이지만 일부 소수의 시인과 소설가들이 각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덕분에 문학이 그렇게 어색하고 불필요한 존재로 규정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또 펜을 잡지는 않았지만 핸드폰으로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전파하는 독자와 작가, 비평가들도 있다. 오늘날 문학현상이 존재한다면 이런 전파자들과 작가들이 공동으로 문학의 하늘을 떠받치면서 문학이 아무 소리 없이 바닥이 보이지 않은 깊은 침묵의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전파자들이 때로는 작가들보다 훨씬 더 뛰어나고 위대한 모습을 보인다.
팡팡과 샤오인 같은 우한의 작가와 시인들, 그리고 다른 유형의 창작자들의 일기가 결국에는 이번 역병의 재난에서 가장 독특하고 세밀한 기억이자 문학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일기들이야말로 시대의 가장 견고한 디테일이다. 이런 일기들이 없다면 오래지 않아 역병이 물러가고 몇 년이 지나면 이 재난에서 죽어가야 했던 무고한 사람들의 귀중한 생명은 기억의 공백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17년 전에는 사스가 있었지만 당시에는 팡팡의 일기 같은 기억의 작품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역사는 항상 이정표의 방식으로 지나간 시간의 윤곽을 개괄한다. 팡팡의 일기처럼 양심과 지성을 갖춘 수많은 기록자들의 글쓰기는 이 이정표에 새겨지는 가장 구체적인 문자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땅바닥에 쓰러진 작가와 문학의 얼굴을 다시 일으켜 세워준 팡팡에게 감사해야 한다.
1990년대 이후로 중국의 문학은 오랫동안 영락했다가 최근에서야 다시 사람들의 시야로 복귀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재난 앞에서 문학은 여전히 무능하고 무력하다. 현재의 상황에서 냉소와 아첨이라는 단어로 문학을 표현하는 것은 너무 애매하다. 차라리 무력감이라는 단어로 중국 작가들의 실재를 형용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물론 그들이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현실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실은 확실히 중국 문단에는 냉소와 아첨을 일삼는 작가와 작품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예컨대 원촨(汶川)지진 때 "귀신이 되는 것도 풍류다"라는 시구가 문제된 적이 있었다. 불의의 재난을 당한 망자들을 이렇게 표현하는 시인을 우리가 마음속으로 시인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냉소와 아첨을 일삼는 문인들을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작가로 인정하지도 않고 그들의 작품을 문학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기껏해야 문단을 장식하는 칙칙한 무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고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작가들도 대부분 입을 다물고 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뿐만 아니라 다른 거대한 사회적 혼란 앞에서도 이들의 언사는 대부분 극도로 신중하고 조심스럽고, 발언보다는 침묵을 택하는 경우가 더 많다. 부득이하게 발언해야 할 때는 한 글자 한 구절을 세심히 퇴고하여 사탕발림 같은 말만 던져놓는다. 물론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들의 어쩔 수 없는 무능과 무력감을 이해할 것이다. 또 일부 독자들은 작가의 신분으로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그런 말을 하느니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났다고 비판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작가들 가운데 하나인 나도 이런 무능과 무기력을 충분히 이해한다. 인간은 누구나 특정한 환경 속에서 생활하는 법이라 나도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작가들과 함께 있게 된다면 본심과 다른 태도를 보이거나 마음에 없는 말을 하지 않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다.
이번 역병 사태와 관련하여 내가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작가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감정과 속마음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모옌은 일찍이 "한 마음으로 나쁜 귀신들을 쫓아내야 한다"라고 말한 바 있고 작가협회 주석인 테닝은 "문학은 기억에 관여하고 대의에 관여하되 책임과 깊은 사유가 뒤따라야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모두 특수한 상황에서의 기억과 각인의 어려움을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인민일보`가 역병과 관련된 작가들의 발언 가운데 일부를 편집하고 수정한다고 소문도 있다. 이런 편집과 수정은 방법을 달리한 강간과 다르지 않다. 강간을 당한 뒤에는 모두가 이를 참고 감수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보편적인 무력감과 그럭저럭 대충 살아가는 태도가 중국 작가들의 참모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기존의 언어 환경에서 누가 그럭저럭 살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도 마찬가지다. 거의 모든 작가가 이 모양이다. 이것이 중국인들이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방식이다. 눈물이 우리 모두의 위로인 것과 마찬가지다.
중국사회에서 가장 반성적 사유가 필요한 부분은 바로 다른 목소리에 대한 포용이다. 다른 목소리에 대한 포용에서 시작하여 언론의 개방과 자유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다른 목소리의 포용은 수천 년 동안 인류문명 정도의 척도였다.
한 국가나 사회, 민족, 단체, 기구, 업종의 개방과 문명의 수준은 다른 목소리에 대한 포용과 언론개방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 마오쩌둥은 "남들에게 말을 하게 해야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라고 했고 덩샤오핑은 이른바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을 주장했다. 시진핑 주석의 아버지 시중쉰도 "어떤 사람의 발언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2016년에는 시진핑 주석도 인터넷 감독 좌담회에서 "인터넷에 떠도는 선의에서 나온 비판은 당과 정부의 업무, 고위간부 개인에 관한 내용일지라도, 그것이 부드러운 바람이나 가는 비이든, 귀에 거슬리는 충언이든 간에 기꺼이 환영하여 이를 진지하게 연구하고 그 가운데 수용할 것은 수용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이 모든 견해와 관점이 다른 목소리나 언론, 논쟁에 대한 사회의 포용과 개방을 강조하고 있다. `다른 목소리`는 사회에 대한 악의의 목소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애국의 입장에서 제시된 서로 다르거나 편차가 있는 견해나 목소리를 말한다. 예컨대 역병 초기에 의사 리원량의 경고도 이에 해당한다. 과거 중국의 역사도 이러한 상식과 이치를 증명하고 있다. 다른 목소리를 포용하고 쟁론을 개방한 사회는 번영하고 진보했지만 다른 목소리를 배척한 사회는 항상 거대한 재난과 혼란에 직면해야 했다. 1960년대 초의 3년 대기근이나 문화대혁명, 에이즈와 사스, 그리고 지금의 코로나19로 죽어간 수천수만 명의 생명들이 이런 사실을 반복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지난 40년 중국 개혁개방의 역사만 보아도 중국의 상하좌우에 다양한 쟁론과 토론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사회주의 정체성에 관한 논쟁에서부터 사상해방운동, `실천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명제에 대한 지식인들의 토론과 이른바 흑묘백묘론 등 온갖 사회적 논쟁이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일련의 논쟁과 논전(論戰)에는 분명히 다른 목소리를 포용하는 관용과 의지가 담겨 있다. 이러한 관용과 포용이 없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사상과 관념이 `중세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상태에서 G2의 찬란함과 위업을 거론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다른 목소리가 다 정확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모든 다른 목소리는 필연적으로 선의에서 나온 것일 수밖에 없다. 설사 착오가 있다 하더라도 그 존재가 포용되면 바른 소리의 힘과 정확함을 증명하는 좌증이 될 수 있다. 포용의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다른 목소리의 의미와 무의미를 깨닫게 할 수도 있다. 에밀 졸라의 소설에는 미녀 주변에 추녀가 함께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 소설에서 추녀의 역할은 미녀의 아름다움을 증명하면서 미녀를 더욱 아름답게 부각시키는 것이다. 다른 목소리가 없다면 가공송덕도 의미가 없다. 다른 목소리가 위대한 공적의 뿌리이자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다른 목소리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적어도 바른 소리를 보완하고 돋보이게 하며 그 정확함을 증명하는 장치가 된다. 검정색이 함께 있어야 흰색의 아름다움과 순결함을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항상 상식을 오류 혹은 진리로 구별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진리의 정확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대가가 필요한 반면, 상식으로 돌아가는 것은 대단히 간단하고 지불하는 대가도 훨씬 적다. 다른 목소리를 포용하는 것은 상식으로 돌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후스(胡适)가 "포용이 자유보다 중요하다"라고 말했던 것도 다른 목소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요컨대 포용이 개방으로 발전하고, 개방이 자유로 발전해야 한다. 시진핑 주석이 "부드러운 바람이든 가는 비이든 귀에 거슬리는 충언이든 기꺼이 환영하여 진지하게 연구하고 수용한 것은 수용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도 사람들에게 발언권을 주자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또한 정책집행자들의 능력을 높여야 하고 가장 기본적인 책임감을 갖게 해야 한다. 그래야 구조적인 개혁과 체제의 정비가 가능하고 거대한 재난과 혼란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역병 초기에 아이펀이나 리원량 같은 의료요원들을 제외하면 모든 사람과 사회시스템 전체가 쟁반 위의 흩어진 모래알처럼 엉성하고 허술하기만 했다. 후베이에서 우한까지 거의 모든 기관의 정책집행자들이 우리가 말하는 가장 일상적이고 기본적인 인간과 생명에 대해 책임을 감당하지 못했다.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간단한 일조차 하지 않아 개미구멍에 제방이 무너졌고, 재난이 닥치자 허둥지둥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것이다. 역병이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만연할 때도 그들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수수방관하고서 엉뚱한 이야기로 진상을 덮어버렸다.
왜 그때 일어서서 아주 작은 행동으로나마 천만 우한 주민의 생명에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 없었던 것일까. 14억 인구의 대국에 누가 민족의 진정한 책임자인가. 한 사회시스템에서 권력을 쥔 핵심인사들 가운데 아무도 국가와 민족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려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모든 재난의 진정한 근원일 것이다. 정책집행자들에게 이러 최소한의 책임의식도 없다면 능력을 논하는 것조차 무의미하다.
사회가 일반 개인들에게 사회의 나사못이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반성적 사유가 필요한 부분은 책임소재의 파악과 인심의 재건이다.
이제 역병 초기에 말했던 전환점이 도래했다. 중국 각지에서 달려왔던 4만여 명의 의료요원들이 후베이와 우한에서 철수를 시작하면서 사람들에게 커다란 위안과 격려가 되고 있다. 생활과 생산이 점차 회복되면서 사람들은 정부의 제2단계 노력과 성과를 기대하고 있다. 중국에서 역병이 물러가고 있을 때, 중국은 전국의 의료요원들을 향해 어떠한 감격과 존중, 어떤 격려와 칭송을 보내도 과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고비를 넘겼다고 해서 매체들이 앞 다투어 승리를 운운하고 있을 때,역병이 처음 닥쳤을 때 도처에 만연했던 직무유기와 실책, 실수를 무시하거나 덮어버려선 안 될 것이다.
축하와 반성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반성과 책임추궁이 클수록 경축의 의미도 커질 수 있다. 어떤 칭송도 생명의 소실을 가리거나 대체해서는 안 된다. 가공송덕은 반성적 사유와 책임 위에 세워져야 한다. 이는 태양이 어둠 속에서 솟아 나와야 빛나고 따스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자연의 논리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태양은 다시 어둠속으로 들어가 버릴 것이고 봄이 왔지만 겨울이 아직 저 앞에 버티고 서 있는 또 다른 결과와 논리를 만들게 될 것이다. 최근 리원량에 대한 긴 조사의 결과가 발표됐다. 많은 사람들이 예감했던 것과 다르면서도 또 사람들의 예감을 크게 벗어나지도 않았다. 사람들의 감정은 통곡의 벽 아래 머리를 숙이고 40일을 보냈는데 또 다른 통곡의 벽이 우아하게 다가온 것과 같다. 40일의 기다림과 조사가 사람들에게 여명의 어두운 틈새로 또 다른 황혼과 어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눈앞의 현실을 놓고 코로나19 이후로 중국인들의 인심은 개혁개방 40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분열상태에 처했다. 이러한 분열이 코로나19를 경험한 중국인들의 갖가지 다양한 입장과 관념, 관점을 양분시키고 있다. 이러한 분열은 과거에도 있었다.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에 대한 좌와 우의 분열도 그 일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분열은 전부 코로나19에 집중적으로 휘말려 있다. 그 폭과 깊이는 좌와 우, 흑과 백의 분열처럼 그렇게 간단하고 분명하지도 않다.
기존의 분열에 기초하고 있는 분열이기 때문이다. 이 분열은 성공적으로 좌와 우의 분열을 확대시켜 모든 중국인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애국주의의 의제로 연결시켜 놓았다. 중국인들은 오늘날처럼 세계의 상황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역병의 세계적인 확산에 대해 음모론과 낙관론, 동정론, 냉소와 풍자, 국수주의, 이성사유 등 모든 형태의 정서와 태도가 애국주의와 어떻게 애국할 것인가 하는 공허하면서도 구체적인 문제로 집중되었다. 이로 인해 가정에서는 부부싸움이 벌어지고 친구들 사이에는 논쟁 끝에 의절사태가 발생하고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는 두 개의 파벌이 형성되는 등 전대미문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이처럼 극도로 보편적인 사상의 양분은 실제로 개인의 정신에서 국가 이미지가 파괴되고 붕괴됨을 의미한다. 다수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국가 이미지가 붕괴된다는 것은 그 다음에 다가올 더 큰 재난과 혼란의 전주이자 예고일 수 있다.
중국은 한편으로는 세계가 하나라고 외치면서 또 한 편으로는 협애한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종용하고 있다. 그 결과 개인의 정신 속에서 국가이미지가 변형되고 왜곡되어 형태가 없어지고 만다. 진정한 국가아미지가 수많은 개인의 의식 속에서 붕괴되고 형태가 없어지면 중국이 말하는 조국에 대한 열애는 바람 속의 바람, 연기 속의 연기, 거대한 바다 속의 어느 작은 수면이나 파도가 되고 말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최근에 `호루라기를 부는 사람`이 중국 네티즌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전파되면서 전대미문의 사회현상을 형성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수천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두가 생각했던 것처럼 `멍청이`나 세심한 이기주의자들이 아닌 각성자, 상식을 아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 증명됐다는 것이다. 특히 `80후(80后·버링허우·1980년대 태어난 세대)`, `90후(90后·지우링허우·1990년대 태어난 세대)`의 젊은이들 대다수가 이기주의자들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하는 진보적 추진세력이었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 사건이 다시 한 번 사회 관리자들에게 오늘날의 인심이 어떤지 깨닫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인심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 법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뒤집을 수도 있다. 이는 천고의 집정의 경험이자 역사의 교훈이다. 안타깝게도 중국인들은 여러 상황에서 인성을 저버리고 반대 방향을 향해 미친 듯이 달리면서 끝내 발걸음을 거두지 않는 모습도 보였다. 최근에 중국이 독재국가가 아니었다면 코로나 사태가 전 세계로 퍼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중국 정부를 비판한 페루 작가 바르가스 요사의 책이 서점에서 전부 철거된 것을 보고 `누군가 정말로 작은 일을 크게 만들고 있구나, 나라를 어지럽히는 일이 잠시도 멈추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임무와 존재의 의미가 적이 아닌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고, 자신을 동정하는 사람을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이는 "대단하다, 우리나라!"라는 자화자찬의 번역본이고 재판에 지나지 않는다.
다행히 중국은 이번 우한 사태를 통해 `다른 목소리`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다른 목소리를 포용하는 사회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절실한 과제가 되었다. 논리는 아주 간단하다. 맹목적인 칭찬은 달지만 좋은 약은 쓴 법이다. 그래서 다른 목소리가 존재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다른 목소리를 수용할 수 있는 사회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에 대해 이제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사람들이 판단하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개혁개방이 40년 동안 거둔 거대한 성취를 돌아보면 다른 목소리를 받아들였던 수많은 방법과 경험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포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개방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교훈일 것이다.
2020년 3월 20일 베이징에서 옌롄커 씀
▶▶ 中소설가 옌롄커는…
1958년 중국 허난성 출생으로 체제 순응적인 군인, 체제 대항적인 작가라는 모순의 삶을 살았다. 가난 때문에 도피하듯 21세에 입대해 28년간 군인으로 복무했지만 군대 내 문학창작반에서도 활동하다 데뷔해 소설가로도 살았다. 1985년 허난대 정치교육과를 졸업했고 1991년 해방군예술대학 문학과를 졸업한 뒤 숱한 장·단편을 발표하며 명성을 쌓았다. 루쉰문학상을 2회 연속 받았고, 프란츠카프카문학상, 홍루몽상을 비롯해 세계 20여개 문학상을 받았다. 매해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다.
`중국의 카프카`로 불리는 명성과 달리, 매번 발표하는 소설은 출판·홍보·게재·비평·각색을 할 수 없는 `5금(禁) 조치`에 시달렸다. 공식적인 금서(禁書) 수는 8권으로 전해지나 `해적판`을 찾는 독자 덕에 숫자가 무의미하다. 발표에 연연하지 않는 자신의 글쓰기를 "서랍 문학"이라 부른다.
최대 문제작은 마오쩌둥의 위대한 정치 구호를 불륜 연인의 성적 암호로 전락시켜 중국 사회를 발칵 뒤집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였으나 최근 들어서는 강제수용소에 갇힌 지식인 집단의 사투와 명멸을 조명한 `사서(四書)`, 주사기를 재사용하는 매혈운동 탓에 무수한 시민이 에이즈에 감염되는 줄거리인 `딩씨 마을의 꿈`, 번영을 위해서라면 윤리를 짓뭉개는 `작렬지`가 작가 본인이 지향하는 문학적 지평인 `신실(神實)주의`에 더 가깝다. 김태성 번역가에 따르면 신실주의란 "보이지 않는 진실, 진실에 가려진 진실을 찾는 전략"을 일컫는다.
한편, 번역가 김태성 한성문화연구소 대표는 중국 문화 번역 사이트인 CCTSS의 고문이며, `인민문학` 한국어판 총감을 맡고 있다. 2016년 중국신문광전총국이 수여하는 중화도서특별공헌상을 수상했으며 옌롄커등 중국 서적 100여권을 번역했다.
출처: 매일경제신문
2020-04-01
[정리 = 김유태 기자]
옌롄커 (閻連科, Yan Lianke) 소설가, 대학교수63세
출생: 1958년 8월, 중국
학력: 해방군 예술학원 문학과
경력: 중국 인민대학교 문학원 교수
홍콩과학기술대학교 고등교육연구소 교수
1992년 중국작가협회
수상: 2014년 프란츠 카프카 문학상
2005년 제3회 라오서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