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만나는 詩 51

경주

[승한 스님의 불교시 감상]내 생의, 내생의 탑을 쌓자  경주/ 심재휘가을 경주에게는 불국사로 간다는 버스가 있어서 낙서하듯 몸 하나가 덜컹거려도 긴 이야기가 된다 지나쳐온 정류장들도 기와를 얹은 집 모양을 하고 있다 낯선 길에 내려 찡그린 얼굴을 햇살에 새기면 시월은 몇 층짜리인지 헐리지 않도록 바람 속에 쌓은 돌 그 돌 위에 돌을 쌓으며 좁아져가는 생애가 내 발자국들을 죄다 모아서 석탑 위에 얹어준다 내 이름은 탑이 가리키는 곳으로 올라갈 만하다고하지만 박모의 하늘에매일 조금씩 덧칠해온 얼굴 하나가 붉게 떠서오늘밤에 나는 불국에 이르지 못하고왕릉 곁의 막걸리집에 국물 자국처럼 앉으면경주의 밤은 속을 알 수도 없는 탁한 술을 마신다깊어가는 어둠을 시큼하게라도 맡을 수 있는 곳평생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정동진

정동진 신봉승 벗이여, 바른 동쪽 정동진으로 떠오르는 저 우람한 아침해를 보았는가 큰 발원에서 작은 소망에 이르는 우리들 모든 번뇌를 씻어내는 저 불타는 태초의 햇살과 마주서는 기쁨을 아는가 벗이여 밝은 나루 정동진으로 밀려오는 저 푸른 파도가 억겁을 뒤척이는 소리를 들었는가 처연한 몸짓 염원하는 몸부림을 마주서서 바라보는 이 환희가 우리 사는 보람임을 벗이여, 정녕 아는가

단순하지 않은 마음

2021 조선일보 신춘문예 詩 당선작 별일 아니야, 라고 말해도 그건 보이지 않는 거리의 조약돌처럼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고 작은 감기야, 라고 말해도 창백한 얼굴은 일회용 마스크처럼 눈 앞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어느 날 아침에 눈병에 걸렸고, 볼에 홍조를 띤 사람이 되 었다가 대부분의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 병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밥을 먹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걸 어오는 우리처럼 살아가다가 죽고 만다. 말끔한 아침은 누군가의 소독된 병실처럼 오고 있다. 저녁 해가 기울 때 테이블과 의자를 내놓고 감자튀김을 먹는 사 람들은 축구 경기를 보며 말한다. “정말 끝내주는 경기였어.” 나는 주저앉은 채로 숨을 고르는 상대편을 생각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 다. 아직 끝나지 않아..

가을 우체국

가을 우체국 이기철 외롭지 않으려고 길들은 우체국을 세워 놓았다 누군가 배달해 놓은 가을이 우체국 앞에 머물 때 사람들은 저마다 수신인이 되어 가을을 받는다 우체국에 쌓이는 가을 엽서 머묾이 아름다운 발목들 은행나무 노란 그늘이 우체국을 물들이고 더운 마음에 굽혀 노랗거나 붉어진 시간들 춥지 않으려고 우체통이 빨간 옷을 입고 있다 우체통마다 나비 처럼 떨어지는 엽서들 지상의 가장 더운 어휘들이 살을 맞댄다 가을의 말이 은행잎 처럼 쌓이는 가을 엽서에는 주소가 없다. 사진: naver blog lis

안개

Fog Carl Sandburg The fog comes On little cat feet. It sits looking Over harbor and city On silent haunches And then moves on. 안개 칼 샌드버그 안개는 고양이 걸음으로 사뿐히 다가와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항구와 도시를 굽어보다 이윽고 자리를 옮긴다. Last Answers Carl Sandburg I wrote a poem on the mist And a woman asked me what I meant by it. I had thought till then only of the beauty of the mist, how pearl and gray of it mix and reel, And change t..

삼복

삼복 / 권지숙 하루가 먼 산허리마냥 지루하다 여름은 순식간에 왔다가 느릿느릿 지나가고 놀이터의 아이들도 어느새 다 자라 버마재비같이 다리만 길어졌다 날카로운 햇살이 흉기처럼 두렵다 낯설기만 한 내 집 발도 머리도 둥둥 떠다니고 손에 잡히는 건 잘게 부서져 낭자한 바닥 그 위를 겅중겅중 뛴다 밖엔 늙은 개 한 마리 땀 같은 피 흘리고 있다 『오래 들여다본다』, 권지숙, 창비, 2011년, 13쪽 출처: blog 주영헌 시인의 詩

하늘 공원

하늘 공원 정대현 (2019 시민공모작) 하늘에서 떨어진 코스모스와 땅에서 버려진 억새가 모여 꿈을 꾸고 있었다 혼자서는 볼 품 없는 모습이 하나 둘 모여 바람을 불러들이고 가녀린 몸에 사랑을 싣고 하늘하늘 춤을 추다가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며 희망을 노래하고 있었다 난지도 능선에는 희망을 꽃피우고 삶을 꿈꾸게 하는 하늘공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