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산에 올라 날마다 산에 올라 5 홍문표 발치엔 질퍽하게 밟히는 아카시아향 중턱엔 침묵의 속살을 후벼대는 쑥꾹새 정수리에 오르니 하늘문이 열리네 무질근한 일상을 털고 신발끈 조여매고 허위허위 오른 산길 엉클어진 호흡을 내뱉으며 한시간을 버틴 결심 팔각정에 오르니 하늘 복판에 내가 있네. 손끝에 잡히는 새하얀 낮달 싱싱한 햇살 몇두룸 소나무 잔가지에 걸어놓고 눈을 감으니 사르르한 이브의 눈짓 세상이 온통 꽃밭이네 시집속의 詩 2020.09.21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류시화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말들이 달라졌으리라 봄은 떠난 자들의 환생으로 자리바꿈하고 제비꽃은 자주색이 의미하는 모든 것으로 하루는 영원의 동의어로 인간은 가슴에 불을 지닌 존재로 얼굴은 그 불을 감추는 가면으로 새는 비상을 위해 뼛속까지 비우는 실존으로 과거는 창백하게 타들어간 하루들의 재로 광부는 땅속에 묻힌 별을 찾는 사람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가슴 안의 시를 듣는 것 그 시를 자신의 시처럼 외우는 것 그래서 그가 그 시를 잊었을 때 그에게 그 시를 들려주는 것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단어들이 바뀌었으리라. 눈동자는 별을 담는 그물로 상처는 세월이 지나서야 열어 보게 되는 선물로 목련의 잎은 꽃의 소멸로 죽음은 먼 공간을.. 시집속의 詩 2020.09.04
간격 간격 - 이정하 그대와 나 사이에 간격이 있습니다. 엄청난 것도 아니면서 늘 그것은 일정하게 뻗어 있어 나를 절망케 합니다. 그러나 나는 믿습니다. 서로 다른 샘에서 솟아나온 물도 끝내는 한 바다에서 만남을. 그대와 나, 지금은 잠시 떨어져 있지만 나중에는 한 몸입니다. 우리 영혼은 하나입니다 시집속의 詩 2020.09.03
세상이 안개에 뒤덮이는 시간이 있다 세상이 안개에 뒤덮이는 시간이 있다 함성호 별의 운명이여, 나를 그 빛 속에 가두어다오 나, 이제, 나를 사로잡던 모든 잔상들에 대해 결별하고 오직 어둠을 보니 장님의 귀로, 저 정교한 우연의 音들을 짚어갈 수 있게 어떤 나무들은 생각한다 버스를 기다리던 그 남자의 얼굴과 한 떠돌이별의 여행을 왜 들판의 강들은 나무의 뿌리를 가슴에 심고 흐르는지 그리고 우리는 보았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밤의 강들은 나무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 남자에 대해 생각한다 이렇게 얕은 강물 위로 검은 물고기들이 밤별의 소리를 따라 아주 돌아오지 못할 우연의 강변을 넘어간다 세상이 안개로 뒤덮이는 시간이 있다 불쑥 내가 그 남자의 지느러미를 보는 시간이다 젖은 노에 말려 소용돌이치는 별빛들 빛의 운명이여.. 시집속의 詩 2020.06.26
폭포 폭포 김수영 폭포瀑布는 곧은 절벽絶壁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規定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向하여 떨어진다는 의미意味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전화金盞花도 인가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瀑布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醉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시집속의 詩 2020.06.26
어머니의 그늘 어머니의 그늘 송문헌 뼈 시린 가지에 바람 이는 밤 꽃잎 흰 적삼을 어깨만큼 드러낸 목련이 윤이월 소금달빛에 서리서리 애처롭다 깊어가도 잠이 오지 않는 밤 별빛 어디쯤일까 어둠 강을 건너가는 가냘픈 밤새 소리 홀로 밤을 뒤채는 매방재 검은 능선이 장막 치고 둘러선 솔터골은 초저녁부터 정지된 마을 빈 마당을 서성서성 잠 못 이루는 밤이면 그랬을 그리운 내 어머니 시집속의 詩 2020.06.13
잔잔한 그리움으로 오는 당신 잔잔한 그리움으로 오는 당신 묘연 이설영 언제부터인지 빈곤한 내 마음에 잔잔한 호수를 만들어준 사람이 있습니다 삼백육십오일 사계의 바람은 요란하지만 늘 나를 잔잔한 물길로 인도하는 사랑 가시 많은 꽃밭 위로 잿빛 구름 떠다니는 날이면 봄빛 미소 온화한 말씨 소탈한 모습으로 거친 마음 밭을 가궈주는 내면의 정원사가 되어 주기도 합니다 깊은 고독의 그림자까지 포근한 양지로 빼곡히 채워주는 그대는 내게 운명의 손길입니다 큰 나무들 사이로 늘 변함없이 올망졸망 낮은 채송화로 겸손히 앉아 있는 당신 깊은 주홍빛 그리움을 담고 있어도 가슴을 슬프게 하지 않는 그대 평화의 쉼터에서 매일 나는 각별한 당신과 마주합니다 시집속의 詩 2020.05.26
소리로 피는 꽃 소리로 피는 꽃 김석이 마른 덤블 헤집고 봄꽃으로 웃는 당신 마주친 눈빛으로 세상을 걸러내고 어둠은 풍경 속에서 오히려 기댈 언덕 오늘 아침 바라보니 어느새 시든 그 꽃 아직도 속삭임이 남아 있는 흐린 창가 소슬비 야윈 소리만 온종일 파고듭니다 지난 길 먼저 와서 부딪치는 언저리 바람 따라 이리저리 꽃비가 내립니다 강물로 드러누운 몸, 뒤척이는 물소리 빈자리 음계마다 못다한 정 맺힙니다 꽉 막힌 슬픔으로 목이메는 대금소리 구멍 난 그 가슴마다 소리로 피어납니다 약력: 201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등단 2013년 천강문학상 우수상 2014년 제1회 대은시조문학상 본상 수상 시조집 '비브라토' '블루문' 출처: 국제신문 시집속의 詩 2020.05.26
바다와 나비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한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3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시집속의 詩 2020.05.26
옛날의 그집 옛날의 그집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십오 년을 살았다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이른 봄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다행이 뜰은 넓어서배추 심.. 시집속의 詩 2020.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