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속의 詩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靑巖 2020. 9. 4. 04:19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류시화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말들이 달라졌으리라
 봄은 떠난 자들의 환생으로 자리바꿈하고   
 제비꽃은 자주색이 의미하는 모든 것으로
 하루는 영원의 동의어로
 
 인간은 가슴에 불을 지닌 존재로
 얼굴은 그 불을 감추는 가면으로
 새는 비상을 위해 뼛속까지 비우는 실존으로
 과거는 창백하게 타들어간 하루들의 재로
 광부는 땅속에 묻힌 별을 찾는 사람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가슴 안의 시를 듣는 것
 그 시를 자신의 시처럼 외우는 것
 그래서 그가 그 시를 잊었을 때
 그에게 그 시를 들려주는 것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단어들이 바뀌었으리라.
 눈동자는 별을 담는 그물로
 상처는 세월이 지나서야 열어 보게 되는 선물로
 목련의 잎은 꽃의 소멸로
 죽음은 먼 공간을 건너와 내미는 손으로
 오늘 밤의 주제는 사랑으로.
 
 

- 류시화,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열람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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