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속의 詩

굴비

靑巖 2019. 10. 12. 02:00

굴비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돌아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더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려주며 말했다

-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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