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오탁번
노약자석엔 빈자리가 없어
그냥 자리에 앉았다
깨다 졸다 하며
을지로 3가까지 갔다
눈을 뜨고 보니
내 앞에 배꼽티를 입은
배젊은 아가씨가 서 있었다
하트에 화살 꽂힌 피어싱을 한
꼭 옛 이응 ㆁ 같은
도토리 빛 배꼽이
내 코앞에서
메롱메롱 늙은 나를 놀리듯
멍게 새끼마냥 옴쭉거린다
전동차 흔들림에 맞춰
가쁜 숨을 쉬는
아가씨의 배꼽을 보면서
나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그 옛날 길을 가다가
아가씨를 먼빛으로 보기만 해도
왼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들끓는 야수를 눌러야 했던
내 청춘이 도렷이 떠올랐다
공짜로 지하철을 타고
맨입으로 회춘(回春)을 한 오늘은
참말, 운수 좋은 날!
―『시인세계』(2009.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