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준의 詩 속으로

노포老鋪의 하루

靑巖 2020. 2. 12. 23:03

 

노포(老鋪)의 하루 / 이상준

 

 

어둠마저 지친 무거움을

간신히 일으켜 세운 새벽

후미진 골목의 10평 남짓한 남루한 무대에

조명이 켜졌다

 

불황의 늪에서 매일의 평범함을 버리고

새로운 기적을 꿈꾸는

무명의 아픔들이 떨거덕거리며

변함없이 복사되듯 살아가는 세상에서

우직하게 서있는 무대

 

수십 년 세월을 한결같이 늙은 여배우의

짧은 대사 한마디에

깊은 위로를 받고

단순하고 소박한 차림에서 연민을 느낀다

 

그녀의 혀끝과 손끝으로

견뎌온 세월을 담아

숙성되고 발효된 맛과 인심은

늘 넘실거린다

 

세월만큼이나 길난 식탁과

뭉근하게 우려진 입맛 손맛이

줄 서서 들어오는 관객을 맞이하고

 

세월의 무게를 이고 온 삶의 무대에서

웃고 울고 했던

여배우의 오래된 삶의 연륜들을

우리는 못 잊어 감상한다

 

우리가 문득 잊고 사는 것들

요즘은 볼 수 없는 것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들

이 낡고 허름한 무대에서

다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루가 지는 골목 언저리

그녀의 무대는

늦게까지 조명이 켜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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