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속의 詩

말을 위한 기도

靑巖 2020. 4. 9. 22:47

말을 위한 기도

 

이해인 수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 놓은 말의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더러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더러는 다른 이의 가슴속에서

좋은 열매를 맺고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기도 했을

내 언어의 나무​

 

주님

내가 짓는 언어의 나무에도

멀고 가까운 이웃들이 주고 간

크고 작은 말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둥근 것 모난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향기로운 것 반짝이는 것

그 주인의 얼굴은 잊었어도

말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와 함께 머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내가 할 말은

참 많은 것도 같고 적은 것도 같고 -

그러나 말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살이​

 

매일매일 돌처럼 차고 단단한 결심을 해도

슬기로운 말의 주인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날마다 내가 말을 하고 살도록

허락하신 주님

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하여

먼저 잘 침묵하는 지혜를 깨치게 하소서

  

헤프지 않으면서 풍부하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유쾌하고

과장하지 않으면서 품위 있는

한 마디의 말을 위해

때로는 진통 겪는 어둠의 순간을

이겨내게 하소서

 ​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의 집을 짓기 위해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道를 닦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하소서

언제나 진실하고

언제나 때에 맞고

언제나 책임 있는 말을

갈고 닦게 하소서

 

​내가 이웃에게 말을 할 때에는

하찮은 농담이라도

함부로 지껄이지 않게 도와 주시어

좀 더 겸허하고

좀 더 인내롭고

좀 더 분별있는

사랑의 말을 하게 하소서

 

​내가 어려서부터 말로 저지른 모든 잘못

특히 사랑을 거스르는 비방과 오해의 말들을

경솔한 속단과 편견과

위선의 말들을 용서하소서 주님

 

나날이 새로운 마음, 깨어있는 마음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 언어의 집을 짓게 하시어

해처럼 환히 빛나는 삶을

노래처럼 즐거운 삶을

당신의 은총 속에 이어 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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