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속의 詩

신부

靑巖 2020. 3. 14. 15:19

 

신부

  

서정주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 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문학적 의의>

생명파 시인인 미당 서정주가 초기의 퇴폐적이고 상징적 원죄의식에서 벗어나 신라와 불교에 대한 관심을 거쳐 가장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정취에 몰입한 시기에 창작된 작품으로, 한국 여인의 매운 절개를 놀랍도록 담담하고 짧은 이야기체로 엮어 놓은 점에 가치가 있다

 

 

 

 

 

<해설>

 

이 시는 시집 <질마재 신화>에 실린 작품으로, 우리 전래의 '이야기'를 시적 소재로 삼고 있다. 그 세계는 상당히 정적이고 신비적인 정서를 지녔다. 40~50년 동안 한자리에 고스란히 앉아 있더라는 이야기는 지극히 비현실적이고 황당하지만, 시인은 이러한 이야기 속에 인생의 한 단면을 날카롭게 담아 내고 있다.

 

이 시는 고대로부터 전해 오는 전설을 소재로 한 것이기에 어려운 시적 의미나 상징들은 그다지 찾을 수 없다. 단지 한 편의 이야기를 시적 서사로 풀어 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신부가 첫날밤에 신랑의 터무니없는 오해로 인해 불귀의 객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 이 시의 '이야기'다. 사려깊지 않은 신랑의 행위, 섣부른 오해, 성급한 판단 등 인간의 여러 우연적 행동과 신부의 비현실적인 기다림은 이 시의 현실적, 비현실적 요소가 된다. 신부의 수동적이고 침착한 기다림과 신랑의 조급성이 첨예하게 대립됨으로 인하여 이 이야기는 그 비극성을 한층 고조시키는데, 신부의 이런 매서운 기다림은 자발머리없는 신랑에 대한 수동적인 저항의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그러한 저항은 신부의 적극적인 의지를 배경으로 할 때에만 가능한 이야기가 되는데, 이런 적극적 기다림은 결국 자기 소멸을 향해 치닫게 된다.

 

한편으로는 우연에 지배당하는 인간의 나약한 심성이 어떻게 운명론에 순응해 나가는가를 보여준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이야기는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 속에는 인간 역사의 아이러니가 숨쉬고 있다. 이것이 어우러져서 드러나는 의미 구조를 읽어내는 것이 이 시를 제대로 감상하는 길일 것이다.


출처:www.woorim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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