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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를 배우다(5)

靑巖 2020. 9. 7. 18:43

김명희 시인의

시 창작 교실

 

시란 무엇인가?

 

4) 시에서 인식의 전환이 중요한 이유

 

김명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화석이 된 날들" 中에서

 

[노파]

 

낯선 동네에 들어

과일트럭 하나 세워놓고 인기척을 살핀다

숨 가쁜 더위는 담장 밖으로 뛰쳐나와

허름한 고샅길을 빈사의 갈증으로 메워놓고

트럭 근처로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창백한 오후다

 

어느 집에선가 새어나오는

흑백주파수의 노래만이 고추밭을 건너와

과일들의 무료함을 덜어주는 심드렁한 한때

문득, 백미러 속으로 들어온 노파가 엉덩이를 내린다

여성성을 잃어버린 지 아주 오래된 듯

앙상한 사연을 쪼그려 앉히곤 미량의 세월만 힘없이 흘리고 있다

 

소박을 맞았다고 했던가

평생 분만의 즐거움 한 번 맛본 적 없다는,

무심히 정지된 풍경 속에서 한 여인이 떠올린 건 어떤 과거일까

 

한낮, 과일들은 더디 팔린다

쉽사리 화석 같은 자세를 풀지 않고

어느 먼 시간 속에 정지된 듯

다시는 인생을 일으켜 세우지 않을 듯 멈추어 있는데

들에서 돌아오는지,

방금 나타난 노인 하나 불임의 세월을 지나쳐

태연스레 더위 저쪽으로 사라진다

 

詩作메모:

 

어느 여름 용인의 한 마을 공터에 차를 세워놓았다. 너무 더우니 손님들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화물차 안에서 스피커로 방송을 틀고 묵묵히 손님을 기다리며 백미러만 주시했다. 불볕더위에 모든 밭작물이 축축 늘어지고, 주위가 너무 고요해 적막하기까지 했다. 먼 데서 곤충의 날갯짓소리처럼 치지짓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가 전부였다. 그때 백미러에 할머니 한분이 보였다. 가만히 살피니 내 차에 사람이 없는 줄 알고 뒷바퀴 앞에 쪼그려 앉아 소변을 보는 것이 아닌가. 그 할머니는 요실금을 앓는지 한참동안 소변을 보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 할머니가 알면 놀랄까봐 숨을 죽이고 차 안에 가만히 있다가 문득 그녀의 앙상한 엉덩이를 보고 서글펐다. 그 할머니도 하체가 풍만했던 시절도 있었을 것이고, 사내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던 분홍빛 날들이 왜 없었을까. 세월이란, 모두에게 그렇게 무상하여 한순간 젊은 건축물 하나를 저렇게 낡게 만들어버리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싫든 좋든 나와 당신도 언젠가 당도할 늙음이라는 지점. 나는 그 노구에 안쓰러움과 경의를 표하는 마음으로 이 시를 썼다. 나도 곧 도착할 그 종착지 아니던가.

 

나의 두 번째 시집에 수록된 작품에는 시 한 편마다 모든 메모가 덧붙여져 있다. 그 시를 쓰게 된 현장의 배경이나 순간의 기록, 또는 그 당시 시를 쓸 때 어느 부분에 초점을 두고 접근하려 했는지 다양한 제 경험들이 담겨있다. 여러분들이 읽어보면 문득문득 어떤 시적 대상을 놓고 시로 쓰기 위해 접근할 때 시 창작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시를 처음 접하는 분들의 답답함을 해소해 드리기 위해 시작메모를 더했다.

 

나이 든 사람들을 떠올리면 우리 뇌 속 깊이 박혀있는 것이 있다.

 

‘느림, 고리타분, 옹고집, 흰머리, 지팡이, 주름, 죽음, 병원, 질병, 퇴행성관절염’ 이 외에도 많겠지만 아마 대략 이런 종류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노인들을 보거나 지나칠 때 표면적인 고정관념이 많이 작용한다. 우리도 곧 늙을 테지만 우선 당장은 나와 상관없는, 나와 먼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타인의 어떤 현상이 나와 가까이 연결되어 있다고 믿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의 문제가 내 안으로 깊이 들어오고 그렇게 인식이 바뀌면 그때부터는 늙음이 어떤 노인만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우리 마음이 그렇게 전환되면 그때, 늙음과 늙어감이 아주 세밀하게 내 안으로 들어온다. 그렇게 되면 연민도 느끼고 더 이상 추함만 보이지 않게 되며 나 자신의 마음이 환히 열리고 나면 노인들의 어떤 모습도 새롭게 내게 다가오고 그들을 가식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시에서 화자는 노파를 보면서 세월이 한 인간에게 끼치는 슬픔을 발견한다. 어쩌면 백미러라는 장치가 그에 한몫을 더 한 것으로 보인다. 작고 동그란 백미러를 거쳐서 보인 한 인간의 삶은 화자가 더 집중할 수 있는 하나의 장치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이 내 안에 나로 가득 차 있으면, 주변에서 보이거나 들리는 자연의 현상이나 메시지가 절대 들리지 않는다. 내 안에 이기심이 가득 차 있거나 내 안에 나를 기쁘게 할 조건들이 가득 차 있으면, 이런 소중한 모습이나 작은 현상들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시인의 마음이 되려면, 우리 마음이 조금 헐렁해져야하고 내 속에 나를 꽉 채우지 말아야 한다. 인식이 변화되고 전환되려면, 내 안에 공간이 생겨야 가능하다. 그래야만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이고 작은 발자국 소리도 크게 들린다.

 

나는 가끔 우리 집 옆 옥상건물의 에어컨 환풍기를 본다.

 

“너는 늘 그 자리에 앉아 일을 하는구나. 참 답답하고 힘들겠다. 너의 견딤이 우리에게 시원한 바람이나 따뜻한 온기를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래서 참 너에게 고맙다는 생각을 해.”

 

나는 종종 이렇게 그 차갑고 네모난 금속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결국 뭘까요? 나의 모든 감각과 본능을 나에게만 사용하지 말고,

 

나를 잠시 내 중심에서 꺼내 변방에 밀쳐두고,

 

그 중심에 다른 사물이나 다른 사람, 즉 이번 시에서 노파처럼 고추밭처럼, 또는 먼 데서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와 같이 주변의 작고 사소하고 미세한 것들을 향해 눈과 귀를 열어야 다양한 사물의 메시지가 들리는 것이다. 그것들을 채집하는 이가 바로 시인이다.

 

그래서 시를 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인식의 전환이라고 말한 것이다.

 

좋은 시, 멋진 시를 쓰고 싶다면, ‘나’라는 볼륨, 나를 향한 애착을 조금 낮춰보자.

나를 향한 애정과 사랑의 볼륨을 조금 낮춰 보자.

 

내 안에서 솟아나는 자아의 볼륨을 조금만 낮추면, 그때는 주변의 무수한 언어들이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너무 가득하다.

나를 꽉 쥐고 온몸에 힘을 바짝 쥔 채로, 시가 안 써진다고 하는데

 

내 안에 내가 터질 듯 가득한데 무엇이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겠는가?

 

‘내’ 속에서 몇 걸음 밖으로 나와보자. ‘나 자신과’ 조금 멀어져 거리를 두고 모든 욕심과 힘을 빼고 내려놓아 보자. 이것이 처음에는 잘 안되지만,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익숙해진다. 다시 말해, 거울 속 나에게만 집중하지 말고 세상도 천천히 넓게 바라보자. 세상을 볼 때 무심히 대충대충 보고 넘기지 말고 마음의 시간을 잠시 멈추거나 느리게 흐르도록 노력해 보자.

 

우린 늘 바쁘다. 누구도 우리를 재촉하지 않는데 언제부턴가 우리 스스로 바쁜 경우가 많다.

 

이제부터는 바람이 불어오고 불어가는 방향도 한번 잠시 서서 눈 감고 온 몸으로 느껴보자. 작은 풀벌레 앞을 지나갈 때, 한 장 나뭇잎이 내 앞에 떨어지는 것을 볼 때

 

그런 작은 움직임을 볼 새도 없이 바삐 걷지 말고, 잠시 그것들을 살펴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시는 ‘잠시 나를 멈춤’ 하는 그 순간 속에 있다.

 

그 속에 시가 우글거리는 것이다. 늘 우리 주변에 있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이다.

 

‘나’라는 볼륨을 조금 줄이면 그것들이 바글바글 살아가는 모습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린다.

 

그것이 인식의 전환이고, 나로 가득 찼던 내 가슴에 공간이 생기고, 타인과 자연이 내 안에 들어와 시가 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그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무척 잘 들리게 된다. 우리 안에 우리가 너무 많으면 인식을 바꾸기 힘들다. 나를 사랑하는 힘을 조금 빼야 그 빈곳에 다양한 사물이 들어오고 좋은 시, 멋진 시는 나를 바꾸는 인식의 전환에서부터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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